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46일째
8월 8일(월) 호우주의보
호우주의보가 내린 날이다. 비가 말 그대로 억수같이 내린다. 월요일인데 육아가 주말보다 더 매운맛 같은 날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남편에게 더 그랬던 것 같다.
몇 년 전 결혼기념일에 남편과 스칼렛 요한센, 아담 드라이버 주연의 <결혼이야기> (aka. 이혼이야기)를 같이 보고 서로의 장점 리스트를 적어본 적이 있다. 만일 지금 그 리스트를 쓴다면 난 아마도 이런 항목을 반드시 적을 것 같다.
우리 남편은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그린라이트에도 굉장히 기뻐합니다.
남편은 둘째가 조금만 쉽게 쌔근쌔근 자도 기대에 차서 이런 말을 한다.
"오늘 완전 푹 잘 것 같아."
난 그런 말을 들으면 속으로 생각한다.
'아.... 지금 그 말만 안 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직 오늘이 다 가지 않았는데 왜 지금 잘 잔다고 내일 아침까지 잘 잘 거라는 기대를 할까? 그리고 그걸 굳이 왜 말하는 거지? 내 성격으론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난 좀 재미없는 타입인데, 어느 정도냐면 수능 때 가채점한 게 진짜 점수보다 10점 정도나 낮았을 정도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기대에 못 미치는 상황을 맞닥뜨려 실망하는 게 너무 싫었다.
남편이 오늘 둘째가 정말 잘 잘 것 같다고 예언(?)한 날이 몇 번 있었는데, 그중 반 이상은 둘째가 끙끙대며 엄청 잠을 설쳐서 우리 둘 다 고생을 했었다. 그런 경우 남편은 문제 해결에 굉장히 적극적이다.
"얘가 왜 이럴까? 뭐가 문제일까?"
그럼 난 이렇게 말해준다.
"애기라서 그래. 신생아잖아. 오늘 이러다 내일 또 나아지겠지."
그럼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야!!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이유를 찾아내서 해결하자!!!"
(나) "..."
딱 위의 '문제 해결'에 대한 말을 오늘 남편이 또 했다. 난 <결혼이야기>의 장점 리스트를 또 하나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남편은 해결사입니다. 무슨 문제든 원인을 찾아내 발본색원 하는 타입입니다.
나와의 대화에서도 '공감'보다는 '문제 해결'에 집중해서 내가 짜증 낸 적이 많았는데, 아마 남편이 둘째를 재우면서 "아 잠이 안 와서 괴롭구나"는 관점이 아니라 "왜 잠을 못 자니? 뭘 도와줄까?"라는 관점으로 아이를 대했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우리 둘째는 딸인데 엄마처럼 자기감정을 공감해주지 못하는 아빠가 답답하지 않았을까?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 역시 상황을 지나치게 단정 지어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신생아의 육아 패턴을 완벽히 파악하고 개선시키려는 남편의 MBTI 중 'T'의 성격이 스스로를 괴롭게 한다는 것이다.
늘 그렇듯 남편이 둘째를, 내가 첫째를 담당하는 오늘 저녁이었다. 8시부터 둘째를 재우기 시작한 남편은 10시쯤 다크서클이 양 볼의 팔자주름까지 내려온 상태로 둘째를 안고 첫째와 내가 놀고 있는 첫째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문제(아이를 재운다)를 해결하지 못해 굉장히 예민해진 상태로 보였고, 스스로 '왜 이 아이는 잠들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에 빠져들어 그 답을 찾고 싶어 괴로워 보였다.
누구나 아이를 재우다 보면 예민해진다. 특히나 34일 된 신생아를 키우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난 당분간 둘째와 남편을 좀 분리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와 둘째에 이어, 남편까지 분리 육아가 필요해지는 시점이다. 잠시 허탈했지만 괜찮다. 난 단유 마사지를 받은 이후로 새 세상에 살고 있는 천사 엄마, 강철 엄마가 되었다.
오늘은 첫째, 둘째 모두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잠들었다. 우리 뜻대로 된 게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괜찮다. 그냥 이런 날도 있는 거지. 그리고 이런 날도 그리워할 때가 온다. 결과적으로 애들 다 피곤에 절어 잘 잔다. 오늘은 내가 새벽 수유 담당이니, 우리 남편도 잘 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