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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Aug 09. 2022

30ml의 조바심을 덜어내자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47일째

8월 9일 화요일 비비비


나는 느긋한 성격이지만 빨리빨리 하는 편이다. 무슨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정말 그렇다. 정확히 말하자면 빨리 하기 때문에 느긋해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리미리 하기 때문이다.


데드라인이 있는 과제나 업무 같은 것들을 할 때는 이런 기질이 빛을 발한다. 이를테면 대학교 때 수업에서 리포트 과제를 한 달 뒤에 내라고 내주었다면 나는 거의 그날 바로 시작한다. 한 달이 걸려도 못할까 봐 걱정해서 빨리 시작하는 건 아니다. 뭘 할지 떠올랐으면 생각이 나자마자 해놔야 직성이 풀렸기 때문이다. 이미 머릿속에 답이 그려지고 있는데 굳이 한 달 뒤에 제출이니까 미뤘다가 3주 뒤에 시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스타일이었고, 덕분에 친구들이 과제 제출 전날에 밤을 새워서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느긋하게 몇 주 전에 완성해둔 것을 확인하고 꿀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향은 때론 팀플레이에는 부정적인 면이 되기도 했다. 특히 기한에 맞춰 차근차근 천천히 진행하려는 팀원들을 만나면 왜 그렇게 마감기한이 한참 남아있는데 급하게 서두르냐는 말을 듣곤 했다. 그래서 회사 업무에서는 이런 점을 보완하여 내가 맡은 영역은 미리미리 빨리빨리 처리하되 남들에게는 그들이 기대하는 타임라인 즈음에 공유함으로써 심리적인 속도를 맞추는 법을 배웠다.


육아는 어떨까. 육아는 과제도 아니고 일도 아니다. 그리고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팀플레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목표로 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자라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즉 미리미리 빨리빨리 하는 내 성향은 육아에는 절대 적용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었나 보다. 7개월이라는 한정된 휴직 기간, 앞으로 다시없을 이런 기회를 활용해 하려고 계획한 것들이 많았다. 물론 육아를 잘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것은 안다. 그치만 운동도 해야 하고 원래 하던 유튜브도 꾸준히 계속 잘 만들어야 하고, 브런치에 글도 쓰고 출판할 책도 준비하려면 서둘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려면 밤에 잠도 충분히 자야 하고 평소에도 내 시간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여력이 거의 없다. 결국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심리가 아직 신생아인 둘째가 빨리 통잠을 자고 낮에도 규칙적으로 먹놀잠을 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이런 점을 반성하면서 오늘 아침 둘째에게 줄 분유를 타다가 문득 아내에게 양을 좀 줄여보자고 제안했다. 사실 둘째는 분유를 주는 만큼 다 잘 받아먹는 편이라 며칠 전부터 양을 상당히 빠르게 늘리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많이 먹으면 더 오래 잘 잘 것이라는 나의 기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분유통에는 버젓이 4-8주 아기는 100ml를 먹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 둘째는 이제 막 5주가 지났다. 억지로 양을 130ml로 늘린다고 더 오래 자기는커녕, 더 많이 끙끙대고 잠을 설쳤다. 소화가 잘 안 되고 더부룩해서 그랬나 보다.


원래 먹어야 하는 양에 맞춰서 분유를 타서 먹이고 있는데 갑자기 문자가 왔다. 전에 인원이 꽉 차서 등록을 못했던 스포츠센터에서 오전 10시 수영 자리가 났으니까 시작하려면 등록하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지난 7월 11일 일기에서 수영 등록에 실패하고 계획이 다 망했다고 썼지만, 최근 몇 주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아마 그때 바로 등록을 했다면 못 가는 날이 더 많지 않았을까. 순리대로 대기 순위 2번에 걸어두고 기다린 결과 달리기와 턱걸이도 해볼 수 있었고 이렇게 적절한 시기에 수영을 시작을 할 수 있게 됐다.


오늘 하루 둘째에게는 계속 순리대로 100ml의 분유를 주었다. 고작 30ml지만 조바심을 덜어냈기 때문인지 둘째는 하루 종일 순하게 잠도 잘 잤다. 내가 혼자 미리미리 한답시고 빨리 서두르고 조바심을 내봐야 아기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남의 아기가 50일 만에 통잠을 자건 70일 만에 10시간을 자건 억지로 빨리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순리대로 차근차근하다 보면 내 일상도 남은 휴직기간도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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