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이는 병원 어린이집으로 남편은 사무실로 나는 엄마 병실로 우린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엄마는 심란한 마음이었겠지만 그래도 1인실이라 편하게 화장실을 이용하고 잠을 주무셨는지 컨디션이 괜찮아보였다.
"엄마, 나 왔어."
엄마는 이모랑 통화중이셨다.
난 짐을 정리하면서 엄마와 이모와의 통화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랑 통화했어. '엄마. OO이 암이래요. 마음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엄마가 OO이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요. 솔직히 아들이랑 많이 차별해서 상처준 건 맞잖아.' 내가 이렇게 얘기했다. 너도 엄마를 용서하고 마음이 편안해져야돼."
"그랬더니 엄마가 뭐래?"
"걔가 왜 암이라니? 이러더라. 네 문자에 엄마 번호 남겨줄테니가 전화한 번 해볼래?"
"언니, 내가 전화하면 엄마가 인정할 것 같아? 엄마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할 것 같아? 절대 안할 걸.
언니도 나한테 엄마 용서하라는 말 하지 마. 지금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그래, 알았다. 그래도 엄마가 네가 아프다니 뭐 느끼는 게 있겠지. 어쨌든 연락처는 남겨놓을게."
엄마는 어눌해진 말투에 화를 가득담아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난 엄마와 이모와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엄마! 할머니한테 전화할거야? 절대 전화하지마!"
"전화 안해. 해서 또 무슨 말을 듣고 상처를 받으려고."
"응, 절대 하지마. 그리고 이모가 왜 엄마한테 할머니를 용서하라마라야. 엄마가 엄마 같았어야 말이지.
아, 진짜 열받네. 내가 이모한테 전화해서 아예 못박을까? 엄마한테 그런말 하지 말라고?"
"아니, 하지마. 내가 하지말라고 했으니까 이제 안하겠지."
나는 길길이 날뛰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요양원에 계시는 외할머니에게 전화해 원망의 말을 쏟아내고 싶었다.
할머니가 어떤 상황이신지 나에게 중요치 않았다.
어떨 땐 엄마의 얘기가 나오면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은 할머니였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할머니보다 우리 엄마가 먼저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어떻게든 할머니한테 상처를 주고 싶었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아프게 된 것에는 할머니가 50퍼센트 이상 지분이 있다고. 그러니 이제라도 인정하고 엄마한테 사과하시라고.
지금은 나에게 그저 엄마의 엄마가 되어버린 한발짝 멀어져버린 나의 외할머니.
나는 화를 낼 대상에게 화를 내지 못해 어쩔 줄 모른채 씩씩거렸다.
결핍이 많았던 가정환경에서 받은 상처를 치료받지 못한 채 상처가 덧씌워져 결국 아파져버린 엄마.
그저 외할머니에게 '미안했다'는 말만이 듣고 싶었을 엄마.
그저 그 한마디였으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렸을 엄마.
그 말을 64세가 될 때까지도 기다리고 있는 엄마.
그 한마디를 하실 줄 몰라서 엄마가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을 터트려버린 날에는 손녀인 나에게 전화하셔서
"니네 엄마 왜 그러니?" 하신다.
나도 이제 클 만큼 컸다고 생각했을 때쯤엔
"할머니가 잘못 하셨잖아요. 엄마한테 사과하세요." 했더니 길길이 뛰시며 절대 인정안하시는 외할머니.
외할머니의 짝사랑인 삼촌은 받을 재산을 다 받고 외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셔놓고 중국으로 가버렸다.
'어쩔 수 없지. 외면하는 수밖에.'
이모에게 할머니를 좀 들여다봐달라는 부탁을 했더니 지친 이모는 그렇게 걱정되면 이제 네가 좀 들여다보라는 말에 저렇게 대답해버린 매정한 삼촌.
아픈 순간조차 할머니에게 위로받지 못한 측은한 나의 엄마가 어린날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채 누워있다.
정신이 또렷해지는 잠깐의 순간에 할머니는 엄마에게 조금이나마 죄책감과 걱정, 미안함을 느끼시기는 할까.
엄마는 내가 더 흥분하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아무말 안하고 TV만 보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내 행동이 엄마에게 위로가 된 것 같았다.
'엄마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엄마에게 상처주는 사람한테는 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그리고 할머니의 전화번호를 엄마 몰래 내 핸드폰에 저장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