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항암부터는 입원하지 않고 낮병동에서 주사를 맞고 집에 가기로 했다.
엄마는 단 몇일이라도 병원에 있는 것을 너무 힘겨워하셨다.
병원 건물만 봐도 속이 답답하고 병원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헛구역질이 난다고 하셨다.
24시간 후에 맞는 면역력 높이는 주사 때문에 항암할 때마다 입원했었던 건데 근처 병원에서 주사만 따로 맞던가 아니면 집에서도 맞을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배주사 놔봤으니 내가 해볼게."
몇개월간 난임치료로 배주사를 놔봤던 나는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구, 그래도 어떻게 네가 놓니. 아빠가 근처에 주사놔줄 수 있는 병원 찾아볼게."
아빠는 내가 주사를 놓는 것이 불안하신지 근처 병원을 찾아보겠다고 하셨다.
당일날 아침 항암을 해도 되는 몸 상태인지 교수님이 진료를 하고 괜찮다고 하면 바로 낮병동으로 가서 예약을 해야한다. 그 날 바로 자리가 나지 않으면 다른 날에 예약을 잡아 또 병원을 와야 한다.
그래도 이 날은 운 좋게 바로 예약을 하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항암주사를 맞으러 온 다양한 연령대의 환자들이 대기중이다.
나는 암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세상을 떠나게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사람들이 많다.
전광판에 빼곡히 적힌 대기하는 환자들...
드디어 엄마 차례가 되어 병실 배정을 받고 눕는다.
약이 들어가기 전에 케모포트에 연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긴장을 한다.
간호사들마다 손이 달라서 어떤 간호사는 낀 줄도 모르게 연결을 해주는가하면 지난번에는 온 몸에 경기하도록 아프게 해서 우리는 일단 긴장부터 하고 본다.
다행히 이번에는 잘 들어가고 2~3시간 정도 주사를 맞는 동안 나는 약국에 가서 약을 타오고 빵집에 가서 밤 식빵을 사왔다.
그 사이 아주 잠시나마 편안해진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숙제를 끝낸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빠는 그 동안 몇 군데 내과에 전화해서 사정을 얘기하고 주사를 맞을 수 있는지 물어봤지만 암환자라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거절하는 병원들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집 근처 내과에서 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아 아빠는 엄마를 모시고 다음날 병원에 갔다.
당연히 엘리베이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착하니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업혀"
"아니야, 그냥 부축해."
엉거주춤 한발 한발 떼기가 힘드셨을 거다.
처음에는 그렇게 어기적어기적 걸으시다가
"내 허리춤 뒷쪽 잡아"
아빠는 엄마 바지 허리춤을 잡고 엄마는 한걸음씩 떼기 시작했다고 한다.
병원에 도착하니 당황한 의사와 간호사가 부축해주었고 주사실까지 가지 않고 대기실에서 맞을 수 있게 해줬다.
내려올 때도 엄마는 계단 난간을 붙잡고 한 계단씩 꼭꼭 밟아 내려오셨다.
내려오니 아빠도 엄마도 진이 다 빠져 맥이 탁 풀리셨다고 한다.
70을 앞둔 두 노인이 낯선 병원에서 어떤 모습이셨을지 머릿속으로 그려지니 서글펐다.
나이들고 병듦이란 서글픔에 가까워지는 일임을 이제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