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열정페이의 기원을 파헤쳐 보자!
1편에서는 대만의 급여 수준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그럼 당연히 드는 다음 질문은
2. 왜 이렇게 급여가 낮은 것일까?
현 세태까지 오게 된 원인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거시적 차원에서 미시적 차원까지 발견한 이유들을 하나씩 나열해 볼게요.
1) 정부 정책
한국과 대만은 싱가폴, 홍콩과 더불어 '아시아 네 마리의 용 (또는 호랑이)'였습니다.
강력한 정부의 진두지휘 하에 수출을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했죠.
다만 구체적인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양국이 차이를 보입니다.
한국의 경제 정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 입니다. (1) 저금리를 통한 인플레를 일정 허용했다는 점과 (2) 대기업 성장 중심 정책을 썼다는 점입니다. 이 두개가 근로자 급여에 어떤 영향을 미치냐!
(1) 낮은 인플레이션 (물가상승율)
대부분 임금은 물가상승율에 연동해서 오르는 성향이 있으므로 물가상승율의 추이를 살펴보면
왜 그 국가의 급여 수준도 상승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겠네요.
출처: https://tradingeconomics.com/taiwan/inflation-cpi
위에서 설명한 정부 정책의 차이가 그래프에서도 나타납니다.
지난 30년간 거의 줄곧 대만은 한국보다 낮은 물가상승율을 보여 왔습니다.
이게 1~2년이면 모르겠는데 30년간 누적되면 '복리'와 비슷한 개념으로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고로 물가 상승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연동되어 상승하는 경향을 보이는 임금도 그만큼 더디게 오를 수 밖에 없었으리라는 단서를 하나 찾았네요.
(2) 글로벌 브랜드를 가진 대기업 유무
대만은 한국에 비해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가진 글로벌 대기업이 적습니다.
매출규모로 포츈 글로벌 500순위에 든 기업이 한국은 15개, 대만은 아이폰 부품 제조사로 유명한 폭스콘을 계열사로 가진 홍하이, 대만 반도체의 자존심 TSMC 그리고 대만 굴지의 금융그룹 Cathay 고작 3개였고,
브랜드 파워로 봤을 때는 500위 안에 한국이 14개, 대만은 고작 2개에 그쳤습니다.
대만 대기업의 대명사 '홍하이'
'삼성'과 '한국'에 적대적이기로 유명한 홍하이그룹 회장 궈타이밍. 샤프 인수를 통해 OEM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브랜드 전략을 준비중인듯... 한 때 총통후보로도 세간에 오르내린 굴지의 인물 (사진출처:successstory)
대만의 삼성 내지는 하이닉스 'TSMC'
금융뿐만 아니라 의료사업도 하는 국태그룹
대만에서 그나마 규모가 큰 기업들은 OEM이나 ODM이 많습니다.
즉 자신의 브랜드를 내걸고 직접 소비자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브랜드를 위해 제품을 위탁 생산하는 체계입니다.
그러다 보니 브랜드(특히 고급 브랜드)가 가지는 프리미엄이 적을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른 부가가치 창출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브랜드와 마진율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 글 참조)
'i' 열풍을 업고 비싼 가격에 제품을 파는 애플과 한 때 잘 나가던 시절 소니가 고가에 팔던 VAIO를 생각해보면 아마 이해가 될 겁니다.
워크맨 신화를 시작으로 넘사벽 브랜딩의 아성을 쌓다 내리막 길을 걸은 소니
스티브 잡스 시절, 브랜딩과 마케팅의 정점을 찍었던 애플
결국 요지는 이런 대만 기업들은 매출규모, 이익율 등 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입니다. 이익이 적으면 그만큼 직원들에게 나눠 줄 파이의 크기가 작아질테구요.
또한 제품의 최종 공급자인 글로벌 브랜드를 상대로 가격 협상력을 갖기가 어렵고 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선 첨단 제조기술 확보와 더불어 항상 비용절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즉, 가격경쟁력 확보를 위해 더더욱 비용절감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죠.
비용절감을 하기 가장 쉬운 부분은 역시 인건비겠죠.
(3) 정부의 22K 정책
또 하나의 분수령이 된 것은 2009년 4월 정부가 실업율을 낮추기 위해 발표한 '단기촉진취업조치' 즉 속칭 '22K 정책'입니다.
이 정책의 본래 취지는 대학(원) 졸업생들을 인턴으로 받아주는 기업들에게 월 22,000 대만 달러(즉, 한화 약 80만원 수준)을 지원해 줌으로써 청년 실업을 줄이려는 데 있었습니다.
막상 2011년 9월, 정부 지원이 종료되었지만 문제는 그 후에도 이게 곧 대졸 신입 초봉으로 굳어져 버렸다는 데 있죠.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88만원 세대'라는 말과 유사하다고 보면 되겠네요.
대졸 취업인원의 공급 초과 현상을 이용해 기업들은 대졸생들에게 이 임금 수준을 수용하도록 압박했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비정규직 평균 월급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던 반면, 대만은 이게 대졸 신입 정규직의 월급이란 차이는 있지만요...
2) 국민 성향
전반적으로 대만을 살면서 느낀 점은 대만 사람들이 참 인내심도 많고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맛집 앞에 늘어선 긴 줄을 보게 되는데 한국 같으면 줄서기 귀찮아서 그냥 딴 곳에서 먹는 경우가 많은데 대만 사람들은 불평 없이 잘만 기다립니다.
대만 매체도 인정하는 대만인들의 줄서기 사랑 (출처: 華視)
택시를 내리거나 물건을 살 때도 다들 얼마나 친절한 줄 모릅니다.
웃으면서 "謝謝 셰셰~ 掰掰 바바~"를 외치는 순박한 대만사람들.
얼마 전 중국여행을 다녀왔는데 대만에서 당연하다고 여겼던 이런 작은 친절들이 당연한 것이 아닌 것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대만은 양처럼 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초식동물 사회'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찌 보면 일본인도 참 친절한 '초식동물의 사회'지만 일본인은 本音(혼네, 진심)를 감추고 建前(타테마에, 가식)를 보여주는 다소 '약은' 구석이 있다면 대만인은 그저 순해 보일 뿐입니다. (실제로 한 조사에 의하면 세계에서 외국관광객이 뽑은 가장 친절한 도시가 타이페이기도 했죠)
다툼이 적다는 건 '내가 하고 싶은 말(불만)이 있어도 화합과 평화를 위해 참거나 웃어 넘긴다'가 되는데
우연찮게 접한 아래 기사에도 '왜 대만 직원들은 반항을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네요.
이게 단순히 보면, '친절하다'로 끝날 수 있지만, 모든 걸 싸워서 얻어내는데 (그것이 일제로부터의 독립이었든, 북한으로부터의 자본주의였든, 독재정권으로부터의 민주주의였든, 박근혜정권으로부터의 정의였든) 익숙한 한국인과는 확실히 다른 면입니다.
이걸 '노동자의 권리' 또는 '노조'라는 주제와 결부시켜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전태일로부터 시작된 노동운동에서부터 '귀족 노조', '노조 파업' 등의 뉴스에서도 흔히 접하는 용어에 이르기까지 온통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만큼 근로자들도 자신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근로여건을 개선해왔죠.
물론 대만에서도 근로자 파업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국처럼 과격하다거나 체계적으로 진행되지는 않는 듯한 인상입니다. (연간 몇 명이상 참여하는 노사분규 건수를 찾아보면 가장 정확하겠지만 일단 이쯤에서 정리~)
3) 호봉제 vs 연봉제
여기엔 국내기업들의 '호봉제' 문화도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실제 약 72%의 국내기업이 호봉제를 고수하고 있어 일본이나 EU에 비해서도 임금의 연공성(즉 연공서열이 높을수록 임금이 높은 경향)도 큽니다.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28/2016122800269.html
연차가 올라갈수록 자연스럽게 급여도 올라가는 구조에선 노조가 모든 직원을 대표해 매년 더 나은 급여인상을 사측으로부터 '쟁취'해 내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죠.
반면, '연봉제' 문화에선 노조와 같은 단체 대신 개개인이 상사와의 면담을 통해 급여 인상을 요구하게 되죠.
물론 잘 하는 직원(업무숙달도를 고려했을 땐 주로 경력직)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구조일 수도 있겠지만,
사회초년생을 포함해 전반적으로 (상위에 들지 못하는) 대다수 직원들은 협상력이 약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겠죠.
정리해보면,
1. 대만은 정부 정책에 따라 물가상승율이 낮아 이에 따른 임금상승율도 다소 억제될 수 밖에 없었고,
2. 한국에 비해 글로벌 대기업이 적은 대만은 적은 부가가치 즉 마진만을 남기기 때문에 기업들이 직원들과 나눌 파이의 크기가 기본적으로 작을 수 밖에 없고
위 두 요소는 서로 맞물려 고임금에 대한 직원들의 요구 또는 불만을 어느 정도 억제하는 구실을 제공해 왔고, 이에 더해
3. 실업율을 낮추려는 정부의 정책은 기업들이 초임을 22K에 묶어 두어도 된다는 일종의 구차한 정당화 환경을 조성합니다.
4. 한국 대기업에 오랫동안 정착해왔던 호봉제 문화에서 비롯된 강력한 노조문화가 비교적 적은 대만에서는 이런 조직적 파업이 일어나기 어려운 환경이었고,
5. 여기에 따지는 걸 싫어하고 좋게 좋게 가는 대만인들의 정서도 크진 않겠지만 무시할 순 없는 요소로 작용하였다고 보여집니다.
참고문헌
- FORTUNE GLOBAL 500 기업순위: http://fortune.com/global500/list/
- Brand Finance Global 500 (2017): http://brandirectory.com/league_tables/table/global-500-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