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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May 30. 2023

알파카 인형을 위해서라면 고산병쯤은

페루 쿠스코 무지개산 비니쿤카 투어

페루 쿠스코의 비니쿤카에서 본 알파카 친구


  남미로 여행을 떠난다는 말 한마디에는 수많은 걱정이 따라붙었다. 남미라는 지역이 생소한 사람들은 여행을 즐기기에는 시설이 너무 낙후되고 위생이 나쁘지 않냐는 말을 덧붙인다. 남미를 들어본 적 있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불안한 치안에 대해 걱정한다. 소매치기나 강도, 심하면 살인까지 벌어지는 곳이니 무사히 돌아오라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남미에서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으니, 바로 고산병이다.


  고산병은 고산지대로 갈수록 산소가 희박해져 발생하는 병으로, 증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우리나라는 고도가 높지 않아 고산병을 겪을 일이 거의 없지만, 고산지대가 많은 남미에서는 고산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어렵다. 그렇기에 충분한 적응 기간을 거치지 않고 남미의 고원으로 직행하면 여행을 전부 망칠 수도 있다! 나 또한 고산병이 많이 걱정되어 해결 방법을 열심히 찾았는데, 가장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은 해결책은 하산밖에 없었다. 하지만 멋진 풍경을 보기 위해 산을 올라놓고 아프다고 내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천천히 고도를 높이며 적응하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는 해발 3,000미터 고도에 위치한 페루의 북부 도시 와라즈에서부터 출발했다. 하루 정도 고도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곧바로 해발 4,200미터의 파론 호수 투어를 가서는 고산 지대에서 계단을 오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직접 느꼈다. 이후 고산병과 맞서 싸우며 장장 7시간을 걸어야 하는 69 호수를 포기하고, 비교적 걷는 시간이 짧은 해발 5,000미터 고도의 파스토루리 빙하 투어를 결심했다. 파스토루리 빙하는 파론 호수보다도 높았기 때문에 빙하까지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고산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보였다. 지나가며 그들의 표정을 보니 고산병에 걸리면 죽을 만큼 아프다는 게 과장이 아닌 듯했다.


  그렇게 고산지대 훈련을 마치고 나서 쿠스코에 도착했다. 페루의 전통과 낭만이 살아있는 아기자기한 쿠스코는 보통 마추픽추를 비롯한 다양한 유적지를 구경하기 위해 들르는 곳이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무지개 줄무늬가 인상적인 비니쿤카를 고대하고 있었다. 문제는 비니쿤카가 해발 5,000미터 고도에 위치해 있으며 극악의 트레킹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점이었다. 투어 후기를 찾아보면 할만했다는 평도 많지만 죽을 만큼 힘들었다는 후기가 더욱 많았고... 나는 그 후기들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다. 증상도 제대로 모르는 고산병에 걸려 바닥을 기어 다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남미를 또 언제 올까 싶은 마음과 함께, 앞서 와라즈에서 쌓은 경험이 고산병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희석해 줬다. 내 발로 완등하지는 못하더라도 무지개산을 꼭 두 눈에 담고 싶었다. 여차하면 현지인들이 다루는 말을 타고 오르면 되지 않을까. 돈은 좀 들더라도 경험과 시간은 돈으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도전조차 하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진만 바라보며 후회하는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결국 호기롭게 비니쿤카 투어를 신청했다. 일단 닥치면 어떻게든 하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비니쿤카에 도착해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보니 생각보다 평탄해 보였다. 몇 발짝 걸어보니 그렇게 큰 어지러움은 없었다. 일단 걷다가 힘들면 말을 탈까, 아니면 처음부터 말을 타고 올라갈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이 말을 모는 현지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는 게 들려왔다. 답변을 유심히 들어보니 비니쿤카 정상 직전 모두가 힘들어한다는 깔딱 고개가 있는데, 말을 타도 그 고개에서부터는 내려서 직접 걸어가야 한단다. 게다가 말을 타고 오고 가는 게 각각 80 솔, 즉, 비니쿤카 왕복을 하려면 160 솔이라는 거금을 내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셈을 해보았다. 여태껏 돈을 야금야금 아껴온 이유는 페루에서 알파카 인형을 원 없이 살 생각에서였는데, 160 솔 정도면 인형을 못해도 대여섯 개는 더 살 수 있었다. 대여섯 개라니! 바로 결심이 섰다. 말 탈 돈을 아껴서 알파카 인형을 더 사겠다는 집념이 고산병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나마 지워 주었다. 결국 우리는 직접 걸어서 끝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걸어가는 길에 말을 탄 사람들을 몇 명 지나쳤다. 현지인들은 사람을 태운 말을 직접 이끌며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를 뛰어다니는 기행을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아왔기에 적응했을 테지만 우리에게는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다행히 비니쿤카의 트래킹은 생각보다 무난했고, 마지막 고비라는 깔딱 고개도 힘겹기는 했지만 충분히 할만했다. 두 발로 걸어 올라 마주한 무지개산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비록 구름이 자욱해 밝은 하늘을 볼 순 없었지만, 내 눈에는 색색의 줄무늬가 충분히 선명했고 고산병을 정복했다는 치기 어린 뿌듯함 덕에 즐거웠다.




  말을 타지 않고 아낀 돈으로 나는 비니쿤카 중간에서 하얗고 조그마한 알파카 인형 하나를 장만했다. 쿠스코 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10 솔이나 비쌌지만, 직접 걸어올라 간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비니쿤카 정상에서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고산병에 대한 걱정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현실은 항상 최악의 상상보다 낫기 마련이라, 무언가가 막연히 두렵다면 미리 걱정하기보다 일단 주사위를 던지고 보는 게 낫다. 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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