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네 엄마 아빠가 그렇게 가르치디?

19화. 부모님을 욕먹일 만큼 잘못하지 않았다

by 딩끄적

전문대 세무회계과를 졸업한 후, 세무사 사무실에 취직을 했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막연히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졸업이 가까워지자 생각이 많아졌다. 세무사 사무실은 처음엔 박봉이고 힘들지만, 적응해서 경력이 쌓이면 보수면에서 괜찮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취직 자리가 많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나의 첫 직장이었던 세무사 사무실. 첫 직장이라는 꿈에 부풀어 출근을 했다. 출근을 하고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청소였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에는 막내이기 때문에 당연했다. 상쾌하게 청소를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청소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출근한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청소가 끝나면 전표를 풀칠해서 붙이는 일을 했다. 신입이라서 그런지, 바쁘지 않은 시기여서인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일들만 맡았다. 서류는 만져보지도 못했고, 컴퓨터 또한 켜보지도 못했다. 그저 전표만 붙이고 있었다. 신입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배워가는 과정이니까. 이렇게 차근차근 배워나가는 거니까.


하지만 괜찮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일을 배워야 하는 선배의 말본새였다.


내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 혼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회생활 자체를 처음 시작했으니 당연히 서툴 수밖에 없었고, 선배들이 보기에 부족한 부분이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의 나도 처음 시작하는 실습생~초년생의 사람들을 보며 '언니 미소'를 지을 때도 있지만, '저러면 안 되는데...'하는 것도 있으니 이해한다.


나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꾸짖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고치면 되니까. 그런데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지적 뒤에 따라오는 말들은 참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말 한마디가 있었다.


"너네 엄마 아빠가 그렇게 가르치디?"


나는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니, 설사 부모님께 부끄럽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을 함부로 말하는 것은 정말 잘못됐으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른들께 예의 있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 것은 유치원 때부터 배워왔다. 무엇보다 부모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잘못된 말이며 나쁜 말이라는 것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선배는 내가 실수할 때마다 말끝에 그 말을 꼭 붙였다.


심지어 큰 실수도 아니었다. 걸레질을 할 때 세무사님 방부터 닦았어야 했는데, 다른 곳부터 닦았다는 이유였다. 내가 실수한 것은 인정하지만, 부모님을 욕먹일 만큼 잘못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장난치거나 싸울 때 다양한 욕을 주고 받았지만, 이거야 말로 진짜 심한 욕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욕이 아니면 어떤 말이 욕이겠는가. 그 말은 그 어떤 욕보다도 아팠다.


고3 때, 학교에 10분 지각해서 담임선생님께 들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도 속상하고 억울했지만, 고3의 담임선생님이라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고3의 신분으로 선생님을 이길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는 상황이 달랐다. 용기내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날 며칠을 밤에 잠들지 못하고 고민했다.


'내가 우리 부모님 욕 먹일 만큼 그렇게 큰 잘못을 했나? 이런 곳에 계속 다녀야 할까? 이런 말을 계속 참으면서 다니는 게 맞을까? 그만둔다고 하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할까?'


이런 고민을 하면 할수록 그 선배의 말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너네 엄마 아빠가 그렇게 가르치디?"


그때 결심이 섰다.

'난 부모님을 욕 먹일 만큼 잘못하지는 않았어. 내 행동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하는 건 괜찮지만, 부모님 욕을 계속 들을 수는 없어. 그만두자. 여기가 아니어도, 나는 다른 데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렇게 다음날 출근을 했고, 세무사님에게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퇴근 시간까지 눈치를 봤다. 하지만 퇴근 시간이 다가오도록, 말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용기내서 세무사님께 가서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세무사님은 나보고 그 선배랑 얘기해 보라고 하시고선 그대로 퇴근하셨다. 그때 알았다. 이곳의 실세는 그 선배라는 걸.


용기를 내어 그 선배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그러자 그 선배는 다닌 지 얼마나 됐다고 그만두냐부터 시작해서 엄청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다닌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만둔다는 말을 해? 우리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힘든 일도 안 줬는데, 그만둔다고?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퇴근하는 세무사님 쪼르르 쫓아가서 한 말이 겨우 이거야? 어린 것들은 진짜 잘해줘봤자 소용이 없어."


조용히 말을 계속 듣다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아예 모르는구나. 그냥 조용히 그만두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결국 참지 못해 한마디했다.


"전, 부모님이 욕먹을 만큼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선배님은 제가 실수할 때마다, '너네 엄마아빠가 그렇게 가르쳤냐'고 욕을 하셨어요. 그래서 더 이상 못 다니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가방을 챙겨 나오는 내 뒤통수에 대고 그 선배는 욕을 계속 퍼부었다. 내 말에 오히려 화가 더 난 듯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꽤 무책임했다. 인수인계 없이 빈자리에 들어가긴 했지만, 나 또한 사람 구할 타이밍을 주지 않고 그만뒀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 선배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핑계일 수도 있지만, 나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아예 다른 전공을 선택해서 편입을 하게 되었다. 좋게 생각하면 그 선배 덕분에 더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6년이 넘었는데도 그 선배에게 처음으로 들었던 이 한 마디가 아직도 생생하다.


"너는 걸레질을 할 때 세무사님 책상 먼저 닦아야지, 어딜 먼저 닦는 거야?

너네 엄마 아빠가 그렇게 가르치디?"


지금의 나는 그 당시 선배의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그 나이가 되어 돌아봐도, 여전히 그 선배의 태도는 이해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일이다. 하지만 그 선배는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얼음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당신의 품격이 드러난다."

- 이기주, <언품> 중


말은 그 순간 흘러가면 끝이지만, 그 말에 담긴 감정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그 안에 당신이 누구인지 담겨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말을 돌아본다.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내 말은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있을까.


keyword
이전 17화돌아보면, 모두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