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관계는 결국, 우리가 나눈 말로 남는다
몇 년 전, 중학교 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인연을 끊었다. 하교 후 거의 매일 함께 놀았고,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활기차게 놀았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하며 서로 다른 학교로 가게 되었고, 우리는 자연스레 만나지 않게 되었다. 간혹 sns로 안부를 묻는 사이로 변했다.
갓 20살이 되었을 무렵, 친구의 결혼식, 출산 후 초대, 다른 친구의 결혼식 등... 20년 동안 얼굴을 본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도 어린 시절의 추억 덕분에 그 친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소개팅할 생각이 있냐는 전화였다. 가족 소개가 아닌 이상 거절하진 않기에, 알겠다고 했다. 그분과는 두 번 만났다.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만남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나와는 다른 속도감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부담이 생기니 호감도 사라졌다. 그렇게 정리했다.
퇴근길, 주차장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이야기했다. 소개팅을 주선해 준 데 대해 고마움을 전했다. 그런데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야, 네가 어디서 이런 남자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난 지금 그쪽 주선자랑 너네한테 뭘 얻어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바쁘니까 다음에 다시 얘기해."
겉으론 웃으며 전화를 마무리했지만, 통화를 끊고 난 뒤 마음 한편이 이상했다. 무슨 감정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갈 수 없었다.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친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 사실은 말이야..."
소개팅 이야기, 친구와의 통화 내용을 털어놓는 순간, 울컥 감정이 올라오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눈물이 나왔다. 그때 이상한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 나 상처받았네...!! 언니 나 상처받았어....(울먹)"
친구는 소개해 준 사람을 알지도 못했다. 그저 친구의 친구였을 뿐이다. 그런데 모르는 그 사람보다 친구인 나를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듯한 말투에 상처를 받았던 것이었다. 그 이후 친구의 연락이 다시 오기까지 대략 한 달의 시간 동안 고민했다.
'이 친구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게 맞을까?
우리가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생각이 변했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아니'였다.
친구에게 다시 연락이 왔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카톡을 보냈다. 내용은 이랬다.
'네가 나한테 한 말들은 나에게 상처되는 말이더라. 난 소중한 사람일수록 말할 때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서로 맞지 않아졌나 보다 생각하기로 했어. 그리고 맞지 않는데, 이 나이 먹어서 굳이 맞춰 갈 필요가 있을까 싶더라. 그동안 마음 써줘서 고마웠고, 잘 살고 잘 지내.'
당시에는 후련했다.
'충분히 고민했으니 괜찮아. 잘한 결정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어렸을 때 친구가 성인이 되고 나서 안 맞을 수도 있다'라고, '나이 들면 사람이 걸러진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에 내가 잘한 거라고 착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편이 불편해졌다.
'굳이 그렇게 딱 잘라서 인연을 끊었어야 했나? 나도 똑같이 상처를 준 사람이 되어 버렸잖아. 내 속 후련하자고 다른 사람 상처 주는 건 아니지. 자연스럽게 멀어지면 되지 않았을까? 꼭 그렇게 딱 잘라 말했어야 했어?'
이 일은 마음에 후회로 남았다. 반년 이상을 매일 생각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친구와 인연을 끊은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말로 끝맺음한 내 방식이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자주 안 보던 사이니까 어쩌면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굳이 상처를 줄 필요는 없었다. 친구도 나름의 염려에서 그런 말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베는 말을 주고받으며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조금만 더 조심했다면, 지금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로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하는 말은 양면성이 있다.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따뜻함을 가지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베어버릴 만큼의 날카로움도 지니고 있다. 날 선 말은 날 선 말을 부른다. 마치 부메랑처럼. 부메랑은 날리면 다시 손으로 얌전히 돌아오지만, 날 선 말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채 돌아온다.
나는 기분이 상하면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친구에게도 상처를 줬던 것이다. 그 말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왔다. 당시에는 속 시원할지 모르나, 지나고 나니 후회만 남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더 따뜻하게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관계는 결국, 우리가 어떤 말을 나누는가로 결정된다. 나는 이제 앞으로는, 다정한 말을 건넬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