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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노 May 18. 2016

꿈꾸지 않을 자유

「무슨 꿈이든 괜찮아」-프르체미스타프 베히터로히츠 지음


  뒤늦은 사춘기였을까. 갓 대학에 입학하고 마냥 자유를 만끽해야 할 스무 살에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허무감에 늘 우울했다. 학창 시절 내내 비교적 큰 일탈 없이 모범생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대학에 들어왔는데 말이다. 그 우울감 속에는 갑자기 꿈이 사라져 삶의 의미가 없어진 기분과 함께 무엇이 됐든 다시 꿈을 찾아야 한다는 혼란이 깃들어있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내가 생각했던 꿈은 그저 밖에서 주어진 목표였고, 나는 그것을 성취해야한다는 불안감에 쫓겨 왔을 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 매트릭스 속에서는 청소년기 내가 당연히 물었어야 할 ‘나는 어떤 사람인가’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건지’에 대한 고민이 유예되어 있었다.


“너의 꿈은 무엇이니?”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이니’라고 물으면, 세상의 수많은 직업이 쏟아진다. 때로는 부모로부터 주입받은 듯 보이는 의사, 판사, 공무원과 같은 대답도 있지만 대통령, 소방관, 경찰관처럼 그 나이의 아이다운 대답도 있다. 어쨌거나 모든 대답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이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아니라.

 무엇이 되고 싶은지 에서 ‘무엇’은 성취해야 할 목표가 되고, ‘되는 것’은 효용성의 논리로 치환이 된다. 그래서 진로교육은 미래 사회를 대비하여 어릴 때부터 자신의 적성을 찾고, 그에 맞는 다양한 직업을 탐색하여 전략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아이들은 당연하게 꿈이란 내가 장래에 갖게 될 직업 또는 목표로 인식한다. 그래서 꿈을 이루기 위해선 나의 재능을 찾아 그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고,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어디에도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닌 어떻게 사는 것에 대한 질 없다.  


꿈꾸지 않으면 낙오되는 걸까?

 

  진로교육의 일환으로 어릴 때부터 행해지는 수많은 적성검사는 개인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이 사회에서 필요한 역량으로 재단한다. 심지어 자기 이해랍시고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분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각자의 재능을 직업군과 연결시켜주기까지 하는데, 그렇게 설정한 꿈을 위해 짜여진 로드맵에는 ‘꿈을 위한 10계명’ 따위의 것들도 소개된다. 고작 열 살 전후의 아이들에게까지 목표에 맞는 자기계발에 몰두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강요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고 낙오될 것처럼. 도대체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데 더 필요한, 그러나 때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소소한 꿈과 쓸모없이 보내는 시간들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괜시리 삐딱해진다. “너의 꿈은 무엇이니”라고 묻는 것도, 질문을 받는 것도 싫다. 지나친 생각일지 모르지만 마치 내 존재와 내 삶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성취와 효용성의 수단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꿈을 꾸는 사람이 행복하다? 정말 그럴까. ‘어떻게’ 라는 고민과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이 쌓이지 않은 채 강요된 내 꿈의 끝에는 허무함이 남았다. 그렇다면 나는 꿈꾸지 않는 자유를 꿈꾸겠다.


진짜 무슨 꿈이든 괜찮아?

 

「무슨 꿈이든 괜찮아」는 “꿈은 참 좋은 거야. 누구든 꿀 수 있어.”라는 말로 첫 장을 시작한다. 역시 또 그저 그런 꿈에 대한 강요나 예찬인가 했는데, 이게 웬걸. 그 어디에도 ‘무엇이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그저 소소한 각자의 소망을 소개하는 것이 전부다. 엄마 황새의 꿈은 오늘 하루 늘어지게 쉬는 것이다. 뱀장어 가족의 꿈은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는 것이고, 꼬마 불의 꿈은 소방관 아저씨들과 놀기이다. 하루살이는 ‘딱 하루만 더 살았으면..’을 꿈꾼다. 태양의 꿈은 선글라스!! 누워서 한 번만 자고 싶은 굴뚝이나 날개가 두 개만 더 있었으면 하는 숨 가쁜 벌새의 꿈도 있고, 머리가 길면 소원이 없겠다는 웃기는 상어도 있다. 심지어 촌충은 “꿈? 난 그런 거 잘 몰라.”라고 말한다.


쓸모없어 보이는 꿈들의 소중함.

  

  몇 해 전, IQ 210의 한국인 천재가 45년이 지난 지금 너무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어 ‘충격’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사람들은 저런 천재가 국가와 사회를 위해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그 재능을 썩게 만들었다며 통탄했다. 그러나 그가 거창한 ‘무엇’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삶이 실패한 것일까?



  오늘 하루 그저 늘어지게 잠자고 싶은 엄마 황새의 꿈도 꿈이다. 머리를 기르고 싶은 상어의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꿈도, 거창한 미래는 집어치우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의 버거움에서 벗어나고픈 벌새나 굴뚝의 꿈도 꿈이다.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고 싶은 뱀장어 가족의 목표도 좋지만, ‘꿈? 난 그런 거 잘 몰라.’ 라고 하는 촌충의 꿈꾸지 않을 수 있는 자유도 괜찮다. 그래서 좋다.


  아이에게 꿈꾸지 않을 자유를 주고 싶다. 그저 어떠한 방식으로든 한 인간으로서 내 삶을 즐겁게 살아갈 권리, 내 삶의 꿈들에 꼭 ‘쓸모 있음’의 잣대가 끼어들지 않는 자유를. 그래서 언젠가 아이에게 미래와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오면, 무엇이 되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묻는 엄마가 되고 싶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꿈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야, 또 너의 꿈이 꼭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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