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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노 May 26. 2016

너와의 산책, 순간에 충실한 걷기

「나랑 같이 놀자」- 마리 홀 에츠

  너와의 산책길은 매일 새롭다. 늘 같은 길이지만 너의 시선과 너의 걸음을 따라 닿는 곳엔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오늘도 걸음마다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내 손에 쥐어준다. 갑자기 저만치 뒤뚱대며 뛰어가더니 쪼그리고 앉아 바닥 보도블록 사이에 끼인 이끼를 쑤셔보고, 줄지어 가는 개미도 괜히 한 번 건드려본다. 흥얼흥얼 노래를 중얼거리며 걷다가 길이 아닌 곳으로 갑자기 뛰어들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기도 한다. 숨이 차도록 달리다가 "이게 무슨 소리지?" 하고 새소리나 개구리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날 뒤따라오고 싶어 하다가도 다시 앞장서서 걷고 싶어 하기도 한다. 잠시 벤치에 앉아 군것질을 하며 쉬어가는 순간도 있다. 어서 가자고 재촉할 필요도 없고, 이리로 가자고 잡아끌 필요도 없다. 그저 느릿느릿 두리번거리며 마음 가는 대로 걷는다. 어디라는, 또는 언제 까지라는 목적이 없어 그 어떤 것에도 귀속되지 않는 순간에 충실한 그런 걷기. 평온하고 행복한 순간이다.




  마리 홀 에츠의 「나랑 같이 놀자」도 그렇다. 해가 뜨자 들판으로 놀러 나가는 꼬마 여자아이. 들풀 이파리에 붙어 있는 메뚜기를 한 마리 만난다. "메뚜기야, 나하고 놀자."하고 다가가지만 메뚜기는 금세 달아나버린다. 연못가의 개구리도, 거북이도, 떡갈나무 아래의 다람쥐와 토끼도, 나뭇가지 위의 어치도, 그리고 풀밭에 나타난 뱀까지도 "나하고 놀자."하며 다가가는 꼬마 여자아이로부터 달아난다. 같이 놀아줄 친구들이 없어 슬퍼진 여자아이가 가만히 바위에 앉는다. 그러자 달아났던 동물 친구들이 하나씩 곁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지켜보자 동물들도 더 이상 겁먹고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아기 사슴까지 나타나 여자 아이에게 다가가 뺨을 핥아준다. 행복감에 가득 찬 아이가 환하게 웃는다.     


  

  처음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그림책이었다. 빛바랜 듯한 노란색의 바탕도, 투박한 흑백의 그림은  시선을 사로잡지 못했다, 들판으로 놀러 나온 여자아이의 단조로운 이야기도 지루했고 큰 변화 없이 이어지는 장면에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책장 한 구석에서 잠들어 있던 그림책을 우연히 집어 든 아이는 잠자리 들기 전 항상 이 책을 골라왔다. 반복해서 읽어주다 보니 텍스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림이 새롭게 다가왔다. 단조롭고 지루했던 이야기는 수수하지만 따스했다. 어느덧 나도 꼬마 여자아이를 따라 들판 곳곳에 숨어있는 친구들을 찾고 있었다. 그곳엔 너의 시선으로 발견한 보물 같은 잔잔함이 숨어있었다. 어느덧 내가 잔잔한 미소로 꼬마 여자아이를 지켜보고 있는 해님이 되었다. 마치 매일이 새로운 너와의 산책길을 따라 걷는 것 같았다.

     

  

  늘 어디론가 향하는 선분의 시간성 위에서 살아가는 일상에서 순간은 항상 흘러가버리는 일직선상의 의미 없는 점이 된다. 그것이 지루하고 무의미했다. 그래서 기존의 관성과 타성에서 벗어나는 우연적 만남이 일어나는 순간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낯선 여행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낯설기에 오히려 굳이 길을 찾고자 애쓰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게 마음 놓고 걸어도 되는 길가에서 생기는 우연적 마주침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고자 했다.         

 

시간이 직선이 아니라 원이라면 순간들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의미나 정당한 이유를 위해 다른 순간들이 필요하지 않다. -마크롤랜즈, 철학자와 늑대 중


  그러나 네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된 산책은 반복되는 육아에 지친 내 일상에 가장 큰 휴식이고 선물이었다. 너와의 산책이야말로 매일이 새롭고 낯선 여행길이었다. 너는 어제도 보았던 개미 한 마리도 마치 오늘 처음 만난 것처럼 열광했고, 길가에 흔하게 떨어진 비슷한 모양의 나뭇잎과 돌멩이들이 새로운 것들인 것 마냥 심사숙고하여 골라 주머니에 넣었다. 무심히 스쳐가던 똑같은 길의 변화를 찾아내고, 작은 것들에 눈길을 주고, 귀를 귀울였다. 그래서 너를 따라 걷는 산책길은 선분의 시간성에 귀속되지 않는 매 순간에 충실한 걷기가 되었다. 역동적인 만남도, 극적인 변화도 없는 평온함과 잔잔함이지만 매 순간이 그 자체로 온전한 의미로 차올랐다.



     

  예전에는 그랬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서 있을 때는 어느 날 갑자기 꽃이 피었고, 어느 날 문득 낙엽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젠 몽우리가 맺히는 순간부터 피어오르는 꽃망울의 하루하루를 발견하고, 매일 조금씩 변하는 초록의 색깔을 느낀다. 햇볕이 따사로운 날, 바람이 부는 날, 구름이 낀 날의 공기도 냄새도 다르다. 소원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언젠가 각자 몫의 배낭을 지고, 각자의 몫만큼 스스로 걸어 세상 구경을 함께 떠날 수 있는 날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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