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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노 Jun 04. 2016

무슨 일이든 다 때가 있다

「무슨 일이든 다 때가 있다」-레오 딜런, 다이앤 딜런 지음

'때가 되면 알아서 다 하게 되어있다’ 

 

  나에겐 아이를 키우는 모든 순간이 갈등의 연속이었다. 직접 맞딱뜨리기 전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먹이기, 재우기와 같이 아주 기본적이고 사소한 모든 것에서 그랬다. 예컨대 수유는 원할 때마다 주어야 하는가 시간에 맞추어 주어야 하는가, 밤중 수유는 언제 끊어야 하는가, 이유식은 언제 시작하여 얼마나 먹여야 하는가, 수면교육은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등. 어찌 보면 너무나 일차원적이고 사소해서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할머니는 "아가가 크느라고 그렇다. 때가 되면 다 알아서 하게 되어 있다." 라는 말을 하셨다.

     

‘To Everything There Is a Seoson’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고
돌을 버릴 때가 있으면 모을 때가 있다.
  무슨 일이든 다 때가 있다. 성경의 전도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전도서 제 3장 1절부터 8절, 제 1장의 4절의 내용을 바탕으로 엮은 그림책이다. 2천년 이상 전해져오면서 널리 인용되어 온 만큼 종교를 넘어선 지혜를 담고 있다. 이 그림책이 더욱 감탄스러운 것은 각 구절마다 세계 각지의 다양한 역사와 전통이 담긴 예술 양식을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집트의 벽화, 일본의 목판화, 푸에블로 인디언의 벽화양식, 중국의 비단그림, 인도 무굴 왕조 시대의 그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나무껍질 그림 등에서 인간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무슨 일이든 때가 있다'는 지혜는 문화, 종교, 역사와 인종이 달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삶의 면면에 걸친 공통적 경험과 통찰이라는 작가의 의도일까. 그래서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그 여운이 깊고 새롭다.  

  나무 한 그루가 갓난 아이부터 노인까지 인간의 생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나무 역시 움트는 새싹에서 무성한 나뭇잎과 지는 낙엽, 그리고 앙상한 가지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 변화하는 나무의 계절과 인간의 생 모두 그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인간의 생은 나무로 표현되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때의 이치'가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나름의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는 '때'의 의미를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때가 언제인데'

 

  아이가 돌이 가까워지면서부터는  단유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꽤 스트레스를 받았다. 넘어야 할 큰 산처럼 느껴졌다. 그 즈음 아이는 오히려 신생아 때보다 더 심하게 시도 때도 없이 엄마 젖을 찾았다. 14개월이 넘어가는데 도대체가 수유량이 줄기는커녕 늘어나기만 했다. 이유식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큰 맘 먹고 끊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했지만, 그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육아서와 인터넷을 찾아 온갖 단유법을 시도했고, 무작정 울려도 봤다. 오히려 집착만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국엔 너무 힘이 들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버려두기 시작했다. 정해진 이유식과 식사량  맞추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고, 아이가 원하는대로 따랐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젖만 물고 있는 때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안 있어 아이는 서서히 엄마 젖을 잊어버리는 듯 했고, 점점 음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침에 눈 떠서 한 번 잠들기 직전까지 아이는 낮 동안 엄마 젖을 찾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아서 다 하게 되어있다.” 라던 할머니의 말은 그냥 건네는 위로가 아니었다. ‘때가 되면’이라는 말에서의 ‘때’는 얼마나 신비로운가. 시간은 본래 인간이 숫자로 이름 붙여 분절시켜 놓은 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마다 각자의 내부에서 나름의 속도와 흐름에 따라 무르익는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내가 안달복달해서 억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짐작이지만 어쩌면 아이 내부의 ‘때’가 무르익기 전에 자꾸 조바심내고 재촉했기 때문에 서로 힘들었던 것 같다. 혹은 이제 엄마 젖과 이별하기 전, 아이에겐 나름대로의 애도할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생명체 내부의 리듬, 그리고 자율성

우주를 상징하는 만다라에 계절, 나무, 동물을 그렸다. 세상 만물에 흐르고 있는 생명체의 때는 우주의 원리이다. 즉, 직관적 시간이야 말로 생명체의 자율성이고 본질이다.

  길을 걷다보면 발에 밟히는 잡초 하나도 누가 언제 싹 터라, 언제 꽃 피고 열매 맺어라 하고 통제하지 않는다. 스스로 때가 되면 싹 트고, 꽃 피고, 열매를 맺는다.  생명체 내부에서 무르익어가는 ‘때’는 시계의 시침과 분침으로 흘러가는 동질적이고 균일한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 각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율적인 내적 상태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자율성의 핵심은 곧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다.

 육아도 한 생명체를 길러내는 일이다. 아니, 한 생명체가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이다. 일정한 방향과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역동적이다. 생명이란 것은 원래 그런것이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정태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여 계량하고자 하는 과학의 관점에선 할머니의 '때가 되면'은 비논리적인 육아방식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때가 언제인데!"라고 되물어봐야 소용이 없는. 그러나 할머니가 말한 '때가 되면'에서의 '때는' 직관적 시간이다. 그리고 그 직관이야말로 생명체 내부에 흐르는 리듬의 본질이다.  


  학교에서 나는 어떠한 교사였는가를 되돌아본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교육과정, 정해진 학습량에 끼워맞추다보면 밖으로 삐져나오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 내부의 리듬과 방향성을 인정해주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제도화되고 표준화된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그것을 인정해준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기에 외면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때에 따라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계량화된 속도에 맞춘 톱니바퀴가 아닌 무르익어가는 자신의 때에 따른 직관의 시간을 열어줄 수 있는 공간이 학교에서 가능할까. 아이를 키우며  '무슨 일이든 다 때가 있다'는  심오한 통찰이 담긴 이 문장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고는 했지만,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는 또다시 다른 숙제로 남는 미완성의 깨달음이다.

       

무슨 일이든 다 때가 있다.
무릇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가슴 깊이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버릴 때가 있으면 모을 때가 있고,
서로 껴안을 때가 있으면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있다.
얻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가 있고,
잡을 때가 있으면 놓아줄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으면 꿰맬 때가 있고,
입을 다물 때가 있으면 열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싸울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무릇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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