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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O Mar 26. 2020

#3. '교수 자녀'는 똑똑하지 않다

적당히의 이유





교수아파트,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당시 10개 정도의 교수아파트가 단지를 이루고 있었고 해당 대학의 교수만 입주 자격이 주어졌다.


유난히 내가 태어난 년도에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다. 우리 아파트 단지만의 베이비붐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동갑내기 친구들이 많았고 우리는 함께 성장했다. 우리는 굉장히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의 직업이 같으니 교육환경 및 수준이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것을 배우고 비슷한 것을 경험하면서 자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비슷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었다. 생김새와 이름이 다른 것처럼, 관심사도 장점도 성격도 달랐다.


나의 초, 중학교 선생님들은 '교수 자녀'에 대한 기대가 (은근히, 하지만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기대는 '교수'라는 직업과 나름의 연관이 있는 공부와 관련된 기대였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 기대들이 편애로 귀결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 친구들의 대부분은 공부를 잘했다. (공부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공부를 좋아해서 잘한 건지, 그냥 잘해야 해서 잘한 건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냥 공부가 쉬웠는지도 모르겠다.) 몇몇은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특출나게 잘했다. 당시는 각종 수학, 과학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상을 타 왔고, 후에는 조기 졸업하며 명문대 입학, 현재는 다양한 분야의 뇌섹남녀가 되어있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았다. 역시나 적당히 했다.


선생님들이 자주 나한테 말했다. 학부모 면담에서 엄마한테도 말했다.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한다고.

IQ는 140이 넘는데 노력을 안 한다고. (당시 학교에서 IQ 테스트를 했었다.)

매년 담임 선생님이 바뀌어도 비슷한 피드백이었다.

'밝고 활발하고 자신감 있는 아이인데 머리에 비해 공부를 안 한다.'

(지금 내 IQ는 두 자리는 아닐까?)


정말 내가 노력을 안 했었을까.

어쩌면 그것이 나의 한계였던 것은 아니였을까.

선생님들은 그저 나를 '교수 자녀'로만 봤기 때문에 당연히 공부를 더 잘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공부는 이 세상의 수많은 특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공부를 잘할 필요는 없고, 모두가 공부를 잘할 수도 없다.

'교수 자녀'라고 모두 '교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특기, 내가 진짜 잘하는 것,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

진정한 교육은 각자의 특기를 찾아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왜 우리는 모두 공부, 공부, 공부, 공부에만 집착하는 사회에 살고 있을까.


모두 똑똑할 필요는 없다.

모두 다르게 똑똑할 수 있다.






나는 자존심이 강했고 승부욕이 많았다.

나는 지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노력을 한적은 없었다.

한 번도 정말 최선을 다해 죽기 살기로 노력해본 적은 없었다.

나의 한계에 도달하며 열정을 쏟아본 적은 없었다.

나를 정말 끝까지 밀어붙여 본 적은 없었다.


노력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노력했을 때 이루지 못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정신승리였을까.


혹은 노력할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고 살다 보니 본능적으로 굳이 나를 혹사시키며 압박하는 노력의 굴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적당히 살아가기'를 택한 것이다.

적당히 해도 중간은 가니까, 그리고 하면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가능성을 남겨둘 수 있으니까.


'적당히'를 벗어던지고 '제대로' 살고 싶은 이유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이렇게 알아내고 인정하기까지 30년이 걸린 것 같다.




나는 자존심이 강하고 승부욕이 많다.

나는 지는 것을 싫어한다.

지금은 무엇을 내가 그리 지키고 싶은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적당히 살아간다.

'적당히'는 어쩌면 나를 보호하고 또 그 순간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해두는 수단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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