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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O Mar 29. 2020

#4. 금품갈취의 진실

내가 노는 애라고? (pt 1)





초등학교 5학년, 방송부에 들어갔다. 내 눈에는 화면 앞에서 대본을 읽는 아나운서보다 기계를 요리조리 만지는 기술자들이 멋있어 보였다. 대부분 아나운서는 여자, 기술부는 남자라는 선입견이 있었지만 나는 기술부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짝꿍을 며칠에 걸쳐 꼬셔서 기술부에 지원했다.


그렇게 들어간 기술부는 너무 재미있었다. 영상 촬영, 자막 작업, 방송 송출 등 신기한 기계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윗 학년 기술부 선배들과 친해졌다. 기술부 선배들은 전부 남자였고, 유일한 여자였던 나와 내 친구를 많이 챙겨주었다. 선배들이 졸업하고 나와 내 친구를 포함한 방송부 동기들은 현역이 되어 재미있는 방송반 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나 나도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간 기술부 선배들과 종종 연락하며 좋은 관계를 잘 유지했기에 같은 중학교를 다니면서는 더 자주 만났다. 선배들은 나를 다른 언니들에게도 소개하며 잘 챙겨주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호의가 매우 고마웠다. 중학교 1학년에게 2학년은 (과장을 조금 보태서) 선생님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기에, 나는 든든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2학년 언니오빠들과 자주 어울려 놀았고 언니오빠들과 친하던 다른 1학년들과도 친해져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아마 그것이 잘못된 시작이었다.


나와 친했던 방송반 선배들은 그 학년에서 선생님들한테 제대로 찍혀있는 소위 '일진'이라고 하는 노는 무리였다. 나에게 소개해준 언니들 역시 학교에서 예의 주시하는 무리였다. 따라서 나도 자연스럽게 내 학년에서 '노는 애'가 되어 버렸다. 당시의 나는 내가 '노는 애'가 되었는지 몰랐고 그저 언니오빠들의 이쁨을 받는 것이 좋았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같이 놀던 언니 중 한 명의 생일이 다가오자 선배들은 우리에게 돈을 모아서 선물을 사자고 하며 돈을 모아 오라고 하였다. 순수했던, 혹은 무지했던 나는 말그대로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돈을 냈다. 5만 원 정도 냈던 것 같다. 그렇게 모인 돈은 꽤 되었다.


하지만 생일파티를 하기 전, 이 사실이 선생님들 귀에 들어갔고 이는 금품갈취로 보고되었다. '금품갈취'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돈이나 물품을 강제로 빼앗음'이다. 우리의 생일 계획은 2학년 선배들이 1학년들의 돈을 빼앗은 모양으로 비춰졌다.


이 사건을 금품갈취라고 한다면 나를 포함한 1학년들은 피해자가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학교 입장에서 우리 역시 (잠재적) 골칫덩어리였다. 매학년마다 '노는 무리'는 생기기 마련이었고, 선생님들은 항상 그 무리 근절에 힘썼기에 우리가 나중에 심각한 사고를 치지 않도록 겁을 주기 위하여 모든 부모님을 소환하였다.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오신 부모님은 학교의 전화를 받고 놀라셨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장이 벌렁거렸다'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분 모두 학교 선생님의 전화라곤 상 받는 전화 혹은 칭찬 전화밖에 받아보신 적이 없으셨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학교에서 두 분 모두 교수인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 딸은 사고 아닌 사고를 쳐서 소환당했으니 부끄러우셨을 것 같기도 하다. 부모님은 선생님들한테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셨다. 이 사건은 결국 2학년은 금품갈취라는 사유로 며칠간의 정학 및 사회봉사 징계를 받았고 1학년은 훈방조치로 일단락되었다. 그 후로 한동안 부모님과 나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솔직히 나는 억울했다. 나는 좋은 친구들과 어울렸을 뿐이고, 나를 잘 챙겨주는 선배들을 따랐을 뿐인데 왜 학교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낙인찍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남한테 피해 준 적도 없는데 말이다. 당시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순수한 우정을 매도당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친구들과, 언니오빠들과 좀 더 끈끈해졌었다. 당시 우리는 철이 없었고, 우리의 잘못을 몰랐기에 외부의 탄압은 우정을 더 견고히 하는데 한 몫하였다.


그렇게 공부보다는 우정, 모범생보다는 날라리에 가까운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끝냈다.


그러고 나는 여름방학 중 한국을 떠나 미국을 가게 되었다. 아빠의 연구년* 타이밍이 딱 그때였던 것이다. 엄마는 나를 '날라리' 친구들과 떨어트려 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친구들과 떨어져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학교나 연구 기관에서, 재충전의 기회와 자유로운 연구 활동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1년 정도씩 주는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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