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 가깝고도 먼 마음의 거리
시아버지가 종합병원에서 퇴원하고 재활병원으로 옮기신다고 시댁 단톡방에 시동생이 올린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나는 지금 고3, 고2 두 딸을 두고 있고, 남편은 타 지역에서 3년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작년 6월 퇴사 후 걷기와 등산을 하다가 얻은 족저근막염과 하산하다 넘어져 다친 꼬리뼈 통증을 안고 살다 보니 극도로 삶이 우울해진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시아버지에게 새벽부터 찾아왔던 두통과 울렁거림에 시어머니가 손가락 사혈을 하고 애를 쓰던 중 말이 어눌하고 팔다리 힘이 빠진다고 연락을 받은 시동생이 시아버지를 입원시켰다.
입원 일주일 중 혼자 면도하고 화장실도 가시고 가족들과 통화도 가능할 만큼 상당한 진전을 보이셨다.
시어머니 걱정을 놓지 않는 시아버지를 재활을 열심히 해서 더 건강해져야 아내를 잘 돌 볼 수 있고 5분, 10분 거리에 살고 있는 누님들이 엄마를 잘 돌보고 계시니 재활병원에서 재활을 잘 받으시라고 설득하며 위로가 되어준 시동생은 부모에게는 더 없는 효자고 남매들에겐 든든한 의지처였다.
시아버지는 입원 일주일 만에 재활병원에서 퇴원하셨다.
작년 6월 말일 자로 9년을 다닌 직장이 해체되면서 실직자가 된 큰며느리인 내가 당연히 퇴원도 시켜드리고
시아버지 병상을 지킨 시동생에게 애썼다며 감사함도 표하고 며느리로서 해야 할 도리도 하는 게 맞는다는 건 알지만 19년의 결혼생활동안 멀어지고 식어지고 닫혀버린 내 마음은 그렇게 끈끈한 가족애로 구성된 너희들끼리 잘해보라는 미운 마음이 앞서 내가 할 일을 접어버렸다.
시댁은 5남매다.
나는 서른다섯. 남편은 서른여섯으로 시댁입장에선 남편은 늦은 결혼을 한 셈이다.
우리가 결혼할 당시에 이미 위로 시누이 둘, 한 살 아래인 시동생 부부, 세 살 아래인 막내 시누이까지 모두 십 년에서 이십오 년 가까이 결혼생활 중이었고 각 가정마다 약속이나 한 듯 남매를 낳고 지근거리에서 살며, 나와 일곱 살 차이인 큰 시누이가 부모대신 자리라는 결정권을 갖고 있는 시월드에 결혼과 함께 입성을 했다.
소 대여섯 마리, 누런 강아지 한 마리, 몇 마리의 닭, 밭농사 약간을 지으시며 강원도 A 시 외곽지역에 점잖고 말씀 없으신 시부모가 살고 계셨고, 자동차로 삼십여 분거리 A 시 중심가에 내 친정 부모가 살고 계셨다.
20살에 대학 진학으로 집을 떠나 직장 생활하며 결혼할 때까지 타 지역에서 잘만 살다가 결혼은 소개로 만난 고향 사람과 했다. 내 팔자인가 보다. 시부모는 10여 년 전 농사일에 사고도 겪고 하시면서 자식들 곁에서 살고 싶다고 손위 시누이들이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를 오시면서 시월드는 완성이 되었다.
시누이들, 시동생은 그냥 보통 사람으로 보아서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와 타 지역에서 뭉쳐 살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넘치며 부모 존경이 남다르고 손자녀들까지 모이면 24명이어도 큰소리 나는 법 없이 서로 잘한다, 좋다 하면서 지내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가족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흔히들 가족 간의 있을법한 소소한 흉조차도 없이 저렇게까지 피붙이의 모든 것이 덮어질 수 있을까 싶었다.
큰 시누이 부부가 쥐고 있던 결정권은 시부모 생신 상 메뉴를 의논해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권위를 찾고 있었다. 내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하려 하면 의논 안 한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물러나 있으면 일이 다가오는데 왜 말도 없냐고 말이 돌고, 9년 일찍 결혼생활 중이던 시동생 부부는 시아버지가 그렇듯 시동생이 나서서 집안의 대소사일들을 진행하고 동서는 늘 '난 몰라요, 애 아빠가 해요' 입장이었다.
명절이든 생신상이든 난 시동생과 의논해야 할 판이었다.
'몰라요. 애들 아빠가 알아서 해요'하는 동서는 밉상이어도 시동생이 큰누나 입속의 혀처럼 굴면서 그래도 그 존재감을 무시당하지 않았지만 난 말 없고 직장에 매여있는 남편대신 며느리인 내가 당연히 할 일들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큰 시누이에게는 그것이 의논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었다.
조카들까지 초대한 시댁 단톡방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카톡이 올라오고 별것 아닌 것에도 각자 한 마디씩 하는 걸로도 80여 개를 넘기는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가까이 살면서, 그렇게 열심히 모이면서 종일 카톡카톡이 신기할 지경이고 내 눈에는 분리불안을 겪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따스함과 무한한 이해심이 나와 내 남편에게도 조금만 있었어도 '카톡 나가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업무 스트레스받아 죽겠는데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것도 너무 짜증 나서 과감하게 '나가기'를 두 번 시도했고 성공했다. 그들에게 나는 화목한 가족 구성을 보여주는데 실패하게 만든 불편함이 되었다.
내 섭섭함의 시작은 결혼초부터였지만 3년 전 7월, 막내 시누이가 남편한테 뭐가 섭섭했네 어쩌네 한 것이 내 화를 돋웠고 같은 업종 타 거점에서 일을 하던 막내 시누이에게 메신저를 보내면서 대화를 이어가던 나는
쌓인 섭섭함을 "내가 말을 할 줄 몰라 가만히 살고 있은 줄 아느냐?. 그 자리에 계신 부모님 생각해서 참은 것이다" 하면서 일목요원하게 정리해서 보냈고 한마디도 지지 않고 빙 둘러 글을 쓰던 시누이는 더 이상 메신저를 보내지 않는 것으로 나는 시댁에 두었던 마음을 거두어내었다. 내 결정적 섭섭함은 이것이다.
시부모가 강원도 사실 때 첫 아이를 낳아 백일 무렵 강원도 시댁에 토요일에 모두 모였다.
부엌 옆에 딸린 쪽문을 열면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야 물건을 들고 나오는 좁디좁은 창고방을 치워놨다고 아기 데리고 거기서 자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막내시누이나, 친정이 가까운데 저녁 먹고 친정에 가서 편하게 자라고 하실 법도 한데 아무 말이 없는 시부모도 싫었다. 눈물을 삼키며 밤을 지새우는데 아기는 또 잠을 설치고 난 왜 당당하게 말을 하지 못했을까.
다음날 아침을 먹고 친정 갈 준비를 하는데 막내 시누이가 아기를 안고서는 하는 말이 "언니는 친정 가서 좋겠어요. 아기는 두고 언니만 다녀와요" 이렇게 말을 했다.
손두부를 하신 시어머니가 두부를 좀 싸줘라 하시자 갈 사람이 싸 가란다.
어이가 없고 화가 치미는데 시댁이라 아무 말도 안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때 꾹 참았나 모르겠다.
잘못 들었나 의심했다. 첫 아이를 낳아 딸이 친정에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을 엄마와 엄마 집 가서 몇 시간 못 있으면 또 대여섯 시간 걸려 집으로 떠나야 한단 생각에 맘이 급하던 때였다.
자기들 오 남매가 점심 먹고 다 같이 출발하는 모습을 자기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친정 간다고 오전에 서두르는 게 꼴 보기 싫은 거였고, 아무도 막내 시누이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는 사람도 없었다.
차를 타고 울면서 친정을 갔다. 무슨 70년대 촌극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었다.
지난 시절 철이 없었다 사과 한마디면 될 것을.
또 난 왜 남편만 잡고 당사자한테는 그 후에도 아무 말을 안 했을까?
내 불평에 남편이 시누이한테 얘기를 하니 '농담이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시댁의 화목과 화합이란 것은 자기들만의 것이란 것을 더 굳히게 되었다.
친정은 본인들만 있는 것처럼 뭉치면서 하던 행동과 말들, 그냥 하는 것만으로도 시댁식구에게 인정받는 잘난 시동생인데 마치 우리가 전달하지 못해 몰랐다고 뻔한 거짓말을 시동생이 했을 때 우리에게 전화해서 따져주던 막내 시누이였기에 더 괘씸했었다.
오해였음을 알고도 왜 사과하지 않는가. 막내시누이와의 불화 후 단톡방에 있는 남편도 꼴보기 싫었는지 언제부턴가 남편 생일에는 생일 축하한다는 한마디 글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이 생일인 둘째 시누이 남편 생일에는 여전한 가족애가 넘쳐났다. 그 말 없는 남자가 큰 시누이에게 형식적으로라도 한마디 못 올려놓느냐고 했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로 인해 방문이나 모임이 단절되면서 자연스럽게 거리 두기가 되었다.
나는 그 긴 결혼생활 동안 왜 일련의 일들에 대하여 그때그때 사실규명이나 속상함, 부당함에 대하여 의견 제시를 하지 않고 입을 닫아 버리고 말았는지.
무슨 말을 한들 안으로 접힌 팔은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지인에게만 투덜거렸지 당사자들과의 쿨한 대화 시도는 하지도 않았다.
성장기에도 '나는 엄마를 속상하게 하면 안 돼'하며 억눌렀던 습관들이 결혼 후에 또 다른 가족공동체에서도 그대로였었다.
시도하지 않기는 시댁식구들도 마찬가지다. 모르는 척 단체행동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화목을 유지해 왔다.
대화의 시기를 놓은 지금은 피차 어색하고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가 되어 버렸다.
시아버지 입원 후 간병을 어찌할 것이냐 얘기가 나왔을 때, 현재 백수인 나는 잠시의 고요한 침묵 속의 나의 침묵을 견뎌냄으로써 간병을 거부하는 나의 의사표시를 했다.
침묵 후 자영업을 하는 시동생이 자기가 병간호를 하겠다고 했다.
시동생은 2주간 훌륭한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수고했어요"
"아버지한테 한 번 와보지도 않습니까?"
이제는 이런 대화도 없어진 우리이다.
순간순간 자기 입장 표명을 흐드러지게 명확하게 표현하는 친구가 있다. 진심으로 나도 묵히지 않고 표현하면서 순간순간을 살고 싶어 진다.
침묵의 값은 온갖 불편함과 마음 저림으로 내게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