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좋은 질문은 필요 없다.

좋은 질문이 아니어도 된다는 게 아니라 좋은 질문은 최악이라는 말이다.

by 영화하는 이모씨

막상 질문을 해야 한다고 하니 부담스럽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와 같은 심오하고 철학적인 질문이어야 할 것 같아서 이다.

그러니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질문', 그러니까 작가를 만들어주는 '질문'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질문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세상을 향한 모든 호기심이 이야깃거리, 그러니까 흥미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흥미란 일종의 나쁜 것이다.

관객들이 이야기를 통해 느끼는 흥미는 사실 꺼내놓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것이다.

비밀스러우리만큼 나쁘고 천하고 쉽고 저급해서 그것은 부끄럽다.


당당하고 선하며 고급스럽고 어려운 것은 굳이 이야기를 통해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질문들은 내 입으로 꺼내기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호기심은 그 자체로 있어 보이니 내 입으로 꺼내기 쉽다. 아니, 좋다.

이런 질문을 하는 우리는 스스로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그렇지 못한 질문들은 어쩌란 말인가?

내 입으로 묻기에는 다소 부끄러운 그것들 말이다.


바로 그걸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해결하고 싶어 한다.

"나 말고, 그 주인공이 그러는데...."

마치 X연인에게 매달린 어젯밤 이야기를 내 친구의 이야기인양 누군가에게 써내놓듯이

나를 대신해서 주인공을 그 질문의 구렁텅이로 밀어놓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와 같은 질문은 모든 인간에게 유익하지만 작가에는 무익하다.

이 질문은 비밀스럽지도, 나쁘지도, 천하지도 않으며 어렵고 고급스럽기 때문이다.

그냥 내입으로 하면 되지 굳이 주인공씩이나 불러다 앉힐 일이 아니란 말이다.


작가를 좋은 이야기로 데려다 주려면 질문은 나쁠수록 좋다.

이야기가 되기 위한 모든 질문은 나빠야 한다. 거기에는 욕망이 있고 그래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질문이 나쁘다는 것은 욕망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말하니 그 욕망이라는 것이 엄청난 것인가 보다 싶지만 사실 그 욕망은 굉장히 보편적이다.

누구나 꿈꾸고 원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욕망이라는 말은 너무 부담스러운데 그건 그만큼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누구나 욕망한다. 숨어서 할 뿐이다.

그러니 나쁜 질문에는 두려움이 있다.

내가 그런 걸 궁금해한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두렵기도 하고 어떤 질문은 그 화살이 나에게 닿을까 봐 두렵다. 그래서 내가 아니라 주인공이 그 질문을 ‘대신’ 받아 주길 바란다. 나는 그 호기심의 실타래를 풀고 싶지 않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다가 아니다. (작가 해 먹기가 이렇게 힘들다니까)

질문이 나쁘다고 해서 무조건 장땡이 아니다.

이 질문은 작가에게 쓸모가 있는 모양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이 나쁘디 나쁜 호기심이 감히 이야기의 재료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나쁜 질문을 작가에게 필요한 모양대로 정리하기 위한 방법을 살펴보자.


첫째, 질문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꼭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나 꼭 사람이어야 할 때도 있다.


종교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와 같은 질문은 가능하다. 이런 질문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전제한다. 종교자체가 주인공이니 다양한 사람들을 전지적인 관점에서 언급한다. 자연히 다큐멘터리 같은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이 질문을 하는 사람이 곧 화자가 되니 적극적으로 내레이션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보통의 드라마나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질문의 주체가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 이어야 한다기보다는 사람일 때 이야기로 가기 좋다. 이 질문의 주체가 곧 주인공이 될 인물이기 때문이다.

킬러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주인공의 직업은 킬러다. 이보다 더 명확할 수가 없다.


두 번째, 이 주체의 욕망이 질문 안에서 들끓어야 한다.

이 질문에는 좋은 부모를 꿈꾸는 욕망이 있다. 이제 그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할 것이다. 게다가 킬러이지 않나? 그가 뭘 할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훌륭한 질문이다.


세 번째, 주체와 욕망사이의 아이러니가 클수록 작가에게 필요한 질문이 된다.

좋은 부모를 꿈꿀 수 있다. 그런데 킬러주제에 좋은 부모를 꿈꾸다니...

바로 이 아이러니가 같은 욕망도 더 크게 만든다.

학교선생님이 좋은 부모가 되기를 욕망하는 과정과 킬러가 좋은 부모가 되기를 욕망하는 과정 중에 어느 것이 더 흥미로울까?


위 질문은 영화 <길복순>의 질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영화의 스토리가 저 질문을 잘 풀어낸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평을 하기 위해 저 질문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그 질문 자체가 선명해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좋은 출발이라는 이야기이다. (기왕에 말이 나오 김에 출발이 좋다고 안전하고 정확한 도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pexels-photo-4109256.jpeg 나쁘면 나쁠수록 유혹적이다.



돌아와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독히도 나쁜 질문이다.

한 유명 레퍼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하루에 12마디의 가사를 쓴다는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작가라면 응당 매일‘써야’한다.

그런데 시나리오작가들은 막상 작업할 이야기를 결정하지 못해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쓰고 싶어도 아직 쓸 것을 정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이 그럴듯하다.

그런 작가들에게 나는 매일매일 일기를 쓰듯 질문을 정리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오늘 하루 경험했던 부당함, 감동, 즐거움과 슬픔 속에서 일기를 쓰듯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져보고 그 질문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 질문들이 영감을 가져다줄 것이다.

영감은 가만히 있다 보면 오는 것이 아니다.

죽기 살기로 영감을 만나기를 욕망해야 만나줄까 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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