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설익은 주인공은 뒷 맛이 개운하지 않다.

by 영화하는 이모씨

주인공이 이렇게 어렵다.

주인공이 갖춰야 할 덕목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니...

징글징글하다.


<시학>에서 말하는 주인공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주인공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것 같은 이 말은 사실 세상 복잡한 말이다.

살인은 나쁘다. 아주 비도덕의 끝판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주인공은 스토리 내내 단 한 명의 살상도 안된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영화의 절반은 주인공이 사람을 죽인다. 한 사람도 아니고 아예 때로 죽인다.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감히 내가 지금의 도덕을 정의할 수는 없다.

다만 나도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예전과 같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떠한 경우에도 '노인은 공경해야 한다'는 말이 수천 년 전과 지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를 수는 있다.

예전에는 노인이 어떠한 사람이더라도-천하에 빌런이더라도-그에게 극진한 인물이 도덕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노인이 약자에게 강하게 군다면, 경우에 많이 어긋난다면, 성인지 감수성이 상당히 떨어진다면 그런 노인에게는 대항하는 것이 도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시대를 거듭하며 도덕의 기준도 달라질진대 스토리 안에서의 도덕은 또 다른 개념이다.

예를 들면 주인공이 악당의 일당들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이다.

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들도 그냥 생계형 건달로 집에 가면 누군가의 아들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이니 우리 인간계의 그것을 그대로 적용해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스토리 안에서는 상위개념의 도덕이 항상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모는 여기서

요즘 도덕의 기준을 재정립해줄 테니

그 기준에 입각한 주인공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 스토리의 도덕과 인간계의 도덕의 차이점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혼재하고 복잡하더라도 지켜져야 하는 아주 보편적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모는 주인공은 아주 '보편적 도덕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리남>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수리남>은 윤종빈 감독의 작품으로 만듦새를 논할 만한 수준의 감독이 아니다.

차라리 믿고 본다는 말이 더 맞는 감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주인공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두 가지 큰 허점이 있는데

두 번째 허점이 바로 주인공 강인구(하정우 분)가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강인구는 수리남에 있으면서

전요한 목사를 따르는 그의 신도들이 종교가 아니라 마약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시에 무차별적인 구타와 학대도 목격한다.

이것도 부족해서 그 신도의 일원인 꼬마아이가 나타나

강인구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구해달라고 애원한다.

이 장면은 강인구가 전요한을 죽여야 한다는 비도덕적 선택을 도덕적으로 만들기 위한 명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활용되고 버려졌다.

전요한 아주 나쁜 놈이구만! 그러니 넌 죽어도 싸!

하지만 관객들은 알고 있다. 전요한이 죽어도 저들은 그대로 있다는 걸.


도덕적 명분을 얻는 강인구는 거침없이 전요한 일당을 제거한다.

그리고 한국으로 무사히 와 그의 자녀들과 야구를 하며 놀아주는 다정한 아버지의 자리로 돌아온다.

이 작품이 잘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이 이 때문이다.

그 꼬마아이의 절규를 수리남에서 저지르는 살인의 명문으로만 활용했기 때문이다.

정작 그 아이는 외면했으면서 자가 아이들 곁으로 돌아와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안 한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이 어쩐지 응원이 안된다. 개인의 안위와 자기 새끼만 아는 이기적 주인공은... 됐다.


개인적은 소견으로 전체 시리즈에서 두 번 활용하는 신도들을 보는 장면은 없었어야 했다.

강인구에게 이런 도덕적 딜레마를 애초에 주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실 그는 일개 장사꾼 아닌가.

어떤 집단을, 그것도 마약이라는 무소불위 절대악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집단을 구해내기에 그는 너무 평범하다.


그런데 관객들이 이제야

"맞다! 그냥 펑범한 아저씨였지!" 싶은 것은 강인구가 평범하지 않아서다.

이것이 강인구가 가진 첫 번째 허점이다.

이 작품은 사실 그냥 평범한 아저씨가 국정원도 못해낸 걸 해내서 통쾌해야 한다.

그런데 강인구는 이 미션을 수행하기로 결정한 순간 평범한 강인구는 없어지고 그간 무수히 많은 작품에서 주인공을 해본 하정우가 등판한다.


강인구는 이 미션을 받아들이고 제일 처음 한 일이 차이나타운으로 간 것이다.

협상을 하려고 간 그곳에서 강인구는 첸진이 전기톱으로 사람을 썰어내는 장면을 직면한다.

이런 것쯤은 무섭지 않다는 언더커버 중이니 강인구가 아무렇지 않게 구는 것은 100번 이해할 수 있다.

이 미션을 잘 수행해야 돈도 찾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의 절박함을 생각하면 그의 의연함이 이해도 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자.

누가 내 앞에서 전기톱으로 사람을 썰어낸다?

그 앞에서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일이다.

그 앞에서야 어찌어찌 버텼다고 해도 나오면 바로 토악질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강인구는 아무렇지도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일이 처음인 평범한 아저씨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강인구가 아니고 하정우라 그런가... 싶은 대목이다.


주인공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 기준은 작가가 작품 안에서 세우는 것이다.

주인공은 초능력이 있기로 했어. 주인공은 900년을 살아온 사람이야. 이런 것들만 세계관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를 고민하고 그것들을 조심스레 관객 앞에 펼쳐내는 것 또한 작가의 세계관이다.


우리 집에서는 양말을 뒤집어 내놓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양말은 뒤집어진 채로 빨려서 뒤집어진 채로 말려진다. 그리고 뒤집어진 채로 접어 서랍장에 들어간다.

다시 신을 때에서 아... 양말은 뒤집어 벗으면 안 되겠군 깨닫는다.


친정엄마가 보면 기겁을 하시겠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우리 집이고 우리 가족의 세계관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