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을 했고 새로운 학생들을 만났다.
이름을 외우는데 평균이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내가 학생들을 기억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학생들을 단어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첫 수업 때면 항상 요즘 가장 깊은 관심사가 무엇인지 한 단어로 적어달라고 말한다.
그럼 학생들은 정말 다양한 단어들을 적는다.
수납장, 전셋집, 이별, 비트코인~
그리고 왜 적었는지, 어떻게 그런 생각에 이르렀는 지등을 묻는다. 그러면 학생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는 길지 않지만 그 순간 학생들은 굉장히 많은 것들을 나에게 들킨다
나에게 대해 얼마나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이 수업에 대해 얼마나 열정적인지
얼마나 적극적인 성격인지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떤 포지션에 있는지 등등.
무조건 웃으면서 이야기한다고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나에게 호감과 기대가 있는 학생 중에는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친구도 있지만
어떤 학생은 뭘 그렇게 열심히 적는다. 별 말이 아닌 것도 꼭꼭 손을 눌라가며 적는다.
한 번이라도 눈을 더 맞추는 게 나을 것 같지만 이런 학생들은 중반쯤이나 가야 스스로를 들어낸다.
어떤 학생들은 지나치게 삐딱하다.
이런 학생들은 거의 100이면 100이 이 수업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
그런데 그걸 안 들키려고, 무수한 경쟁을 뚫고 수강신청에 성공했으면서 어쩌다 보니 저절로 수강신청이 되어 어쩔 수 없어 여기 앉아있는 거라는 듯 자세는 불량하고 입도 뻥끗하지 않는다.
이런 학생들은 종강날 장문의 감성문자로 인사를 해온다.
어떤 학생들은 뭔가 새로운 대답을 하고 싶어 무리수를 던지기도 한다.
이런 학생들의 공통점은 정말 순수하는 것이다.
교수가 던지는 우문은 애초에 현답이 어려움에도 스무 살 남짓을 살아온 자신의 철학을 녹여 근사하게 대답한다. 그 대답은 너무 산으로 갈 때가 많지만 정말 어여쁘다.
어떤 학생들은 최대한 숨어있다. 안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런 경우는 아직 그 학생의 관심 안에 나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보통은 복학을 하거나 타과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학생들은 다른 친구들을 살피며 타이밍을 살핀다. 잔뜩 얼어있지만 풀리면 누구보다 밝고 성실하다.
이러니 마치 세상 다 아는 것 같지만 반대로 우리도 누군가에게 무수히 들키고 있을 것이다.
당혹스러움을, 부끄러움을, 애정함을, 분노함을 수없이 들키고 수없이 읽혔을 것이다.
언제일까 돌아보면 의연하게 잘 넘어갔다고 착각한 순간들이지 않을까 싶다.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그런데 우리가 나이를 엄한 데로 먹은 게 아닌 만큼 이렇게 무방비로 당하지만은 않는다.
때로는 당혹스러움을, 부끄러움을, 애정함을, 분노함을 들킬 작정으로 연기도 한다.
에이~ 우리가 무슨 배우도 아니고~ 싶지만 이건 사실이다.
존경하지도 않는 사람 앞에서 존경하는 척
열이 받아 머리카락이 자동 기립했음에도 괜찮은 척
건조하지만 감동에 젖은 척 연기도 한다.
명배우가 따로 없다.
기왕 이렇게 연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렇다면 아예 연기자로 살아보면 어떨까?
이 연기의 목적은 박수가 아니다. 속이는 것이다.
그러려면 나는 지금 나의 상황을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앞으로 잘 될 일만 남아있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뿜어내야 한다.
자신 있는 눈빛, 여유로운, 손짓, 가진 자의 배려가 묻어있는 에티튜드는 기본이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속여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잘 될 거야.
잘 될 수밖에 없어.
내 차례는 무조건 온다.
그럼 나부터 속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둘 사람들을 속여갈 수 있다.
이제 이걸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 이건 어느새 그냥 사실이 된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게 되고
믿고 있다 보면 믿고 있는 것이라 그냥 알고 있는 것이 된다.
잘될 거야.
잘 될 수밖에 없어.
내 차례는 무조건 온다는 걸 세상이 그냥 알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그 방향으로 굴러간다.
자~!
레이디스 앤 젠틀맨!
이제부터 저의 명연기가 시작됩니다~!
박수와 함성으로 시작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