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울어야 할 순간

토마스와 도마씨

by 권박
우리는 마음이 경솔하고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결코 영혼의 병을 발견하지 못한다. 또한 울어야 할 순간조차도 웃어넘기곤 한다... 선한 사람은 언제나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만한 충분한 이유를 찾아낸다. 자신이나 이웃을 생각할 때, 이 세상 누구도 고난을 겪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철저히 성찰하면 할수록 그 슬픔은 더욱더 깊어진다... 스스로를 너무 단단히 옭아매어 신성한 것들을 묵상할 수 없게 하는 우리의 결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는 진정한 슬픔과 내적인 성찰이 되어야 한다. P. 77 1권 21장


부부상담을 종종 진행하는데 잘 되기가 쉽지 않다. 부부싸움이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옛날 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무리 갈라서려 해도 다시 돌아오는 그런 관계가 부부 관계라고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쫘악- 갈라질 때는 단번에 남이 된다. ‘이 부부는 잘 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감이 오는 부부와 ‘갈길이 멀다’라고 느껴지는 부부 사이의 신호는 심각성의 공감 유무이다. 한 사람은 벌어진 사건이 미치는 여파에 고통스러운데 배우자가 그 고통의 정도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할 때 관계 회복은 좀처럼 시작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상대방의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부부관계에서는 배우자의 아픔에 기여한 나의 결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내가 때려놓고 마치 다른 사람이 때린 것처럼 “아팠겠다” 공감하는 것은 유체이탈 화법과 같이 이상하다. 남에게 맞고 와도 마치 나 때문에 아픈 거는 아닌지 살필 수 있는 마음이다. 주로 남편들은 아내의 아픔에 어떻게 공감해야 할지 난감해하면서 후다닥 진지한 상황을 넘기려고만 한다. 반대도 있다. 이번에는 남편은 심각한데 아내는 그런 남편이 속좁고 답답하다. ‘뭐 그깟 일로 남자가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의 태도이다. 아내들은 공감의 말은 해주지만 ‘내 잘못은 아니지’의 태도이다.


울어야 할 때 웃어넘기는 장면을 만나면 난감해진다. 아마 너무 많이 울어서 이제는 웃음밖에 안 나온다는 그 초월적 웃음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불일치되는 모습은 내면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부부상담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고개를 떨구며 힘들다는 말을 하는데 아내가 웃고 있다. 공감이 안되시냐고 물었더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고 한다. 아내가 울면서 아프다고 하는데 남편이 웃는다. 왜 웃으시는지 물었더니 ‘하도 많이 들어서’라고 한다. 그동안의 싸움에 지쳐 배우자가 겪는 아픔을 내 아픔처럼 다 느끼지 못할 수 있다. 나는 네가 아니지 않은가. 어떤 의미에서 공감이란 자신의 경험과 논리에 의지해서 상대방의 감정을 '추측해서' 느끼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존재로서 완전한 공감이란 불가하다. 부부상담까지 오셨을 때는 이미 부부 사이의 너와 나는 더 갈라져 있을 때이니 공감이란 가당찮은 욕심일 수 있다. 그러나 내 결점을 성찰하고 슬퍼할 수 있다. 그것이 공감의 시작이다. 이렇게 슬퍼할 수 있는 것은 부부나 가족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 존재하는 개인이 타인의 고난을 보면서 느끼는 책임의 감정이다.


여기 성공한 도마 부부가 있다.


화만 내지 말고 슬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분노가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면 슬픔은 우리를 성찰하게 한다. 분노는 사람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지만 슬픔은 위로하게 한다. 체면을 세우기 위해 애매하게 웃지 말기로 하자. 내가 잘못한 것을 얼렁뚱땅 웃어넘기지 않기로 하자.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영혼의 병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토마스의 말을 들으며 키에르케고르가 떠올랐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그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관계하지 못할 때 절망하게 되고 절망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절망하지 않으면 구원도 없다고 한다. 이 절망이 토마스가 말하는 영혼의 병이 아닐까. 자신의 결점은 신성한 것들을 묵상할 수 없게 만든다. 자기 자신과 끊어진 채로 사는 절망에 빠지는 것과 분열된 자기를 인식하고 슬퍼하며 성찰해 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죄와 결점은 신성한 것을 묵상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지만 신성한 것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도 한다.


토마스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것을 정리하자면. 절망해라. 너의 결점을, 너의 죄를, 타인의 고난에 대해 절망해라. 울며 슬퍼하고, 아파해라. 하지만 절망이라는 감정에 빠져있지만 말고 자신을 성찰하라. 자신을 성찰하는 것에 멈추지 말고 신성한 것을 묵상하라. 구원은 우리 안에 있지 않다. 확실히 두 분은 옛날 분들이시다. 요즘 세상 분위기를 모르는 말이다. 통제를 잃어버리는 것은 자율성(autonomy)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주관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사람을 얼마나 불안하게 만드는가.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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