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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scus Oct 24. 2018

효율과 충격 : 뛰어난 오프닝의 영화

A Lesson In Visual-telling #1

※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미드나잇>(2013), <다크 나이트>(2008),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것은 죽이는 시작입니다. 카뮈의 <이방인>의 유명한 첫 문장이죠. 이 문장이 왜 (죽을 만큼) 좋을까요? 일단 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확합니다. 그런데 내용이 꽤나 충격적입니다. 엄마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엄청난 내용을 무슨 평범한 일기 쓰듯이 적어놓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비가 왔다. 이런 식으로요.


아침에 비가 온 사건과 엄마가 죽은 사건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멉니다. 그리고 그런 간극이 멀수록 문장의 파괴력은 강해집니다. 그런데 천연덕스러운 것은, 문학 사상 가장 강력한 파괴력의 문장을 소설 맨 처음에 써놓은 카뮈의 태도입니다. 너무 뻔뻔해서 허탈해질 정도죠. 이 문장이 멋진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파괴력과 뻔뻔함. 무릇 멋지다는 것은 충격적이면서 뻔뻔한 어떤 태도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뻔뻔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소설은 문장으로 쌓기 때문에, 문장은 반드시 의도를 담고 있어야 하죠. 주인공 뫼르소는 심드렁합니다. 엄마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혹은 엄마의 죽음에 대해서. 일기 쓰듯이 썼다니까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 얼마나 객관적인 사건의 서술인가요.


카뮈는 이 문장을 통해 뫼르소의 성격과 태도를 곧바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뒤에 그가 엮이게 되는 중요한 사건의 전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뻔뻔하고 충격적이면서, 인물의 내면과 사건의 진행 양쪽 모두에서 매우 효율적입니다. 과연 대문호의 가장 유명한 문장답군요.



이것이 소설의 훌륭한 시작이라면, 영화의 뛰어난 시작은 어떤 모습일까요? 카뮈의 문장처럼, 뻔뻔하고 충격적인데 효율적이기까지 한 그런 오프닝이 있을까요?


3편의 영화를 보겠습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샘 멘데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입니다.


첫 번째 영화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 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바로 기찻길이 보입니다. 배경음악과 함께 기차가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고요. 타이틀이 나타났다 사라진 후, 빠르게 지나가지만, 자세히 눈여겨보면 두 개의 기차선로가 하나의 선로로 합쳐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링클레이터 감독이 의도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비포 선라이즈는 전혀 상관없던 두 인물이 우연히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이니까요. 기차와 기찻길은 인생에 대한 알레고리로 자주 활용되기도 하고요.



뒤이어 기차 안에서 서로 다투는 중년 부부가 등장합니다. 셀린은 그들의 다툼이 신경 쓰이자 자리를 옮기죠. 셀린은 남녀 사이의 다툼, 현실적인 문제들에서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옆자리엔 제시가 앉아있고, 중년 부부가 퇴장하자 제시는 셀린에게 먼저 말을 겁니다. 제시는 먼저 말을 거는 사람입니다. 우연을 만들기 좋아하고, 이야기를 만들기 좋아하죠. 이런 설정은 18년 후 그들의 이야기인 <비포 미드나잇>까지 이어집니다. <비포 미드나잇>에서, 셀린이 현실로부터 도망쳐있으면 제시는 그에게 다가가, "혹시 혼자 오셨어요?" 이야기로 말을 겁니다. 그러니까 <비포 선라이즈>의 시작은 셀린과 제시의 핵심적인 성격을 잘 제시하고 있는 것이죠.


한편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커플이 나이를 먹으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때 셀린이 말하는 대사는 사실상 비포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됩니다. “서로에게 점차 무뎌지는 거죠 (I guess they sort of nullify each other).”


이 일련의 과정은 인물의 성격과 태도를 명확히 드러내면서, 사건이 진행될 방향을 느슨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프닝 씬만 본다고 해서 이야기의 전체를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죠. 그럼에도 오프닝에 작은 씨앗을 심어두는 것이 필요한 까닭은, 이야기를 끝까지 다 보고 났을 때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하나의 끈으로 꿰어지는 듯한 효과 때문입니다. 이 하나의 끈은 곧 작가가 하고 싶은 말, 주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포 선라이즈>의 오프닝은 매우 효율적이면서 똑똑한 시작입니다. 그러나 카뮈의 문장과 비교해볼까요. 분명 카뮈의 문장은 인물과 사건 양쪽에서 효율적이면서도, 무엇보다 충격적이었죠. <비포 선라이즈>의 오프닝은 충격적인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효율과 충격은 상반되는 특징입니다.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다 보면 정돈되고, 정돈되면 충격을 전달하기 곤란해져요. 반면 신선하고 뻔뻔한 장면만 골라 넣다 보면 유기적인 스토리텔링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충격적인 오프닝은 어떤 모습일까요? 두 번째 영화, <다크 나이트>를 보겠습니다.



딱히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다크 나이트>의 시작은 충격적입니다. 충격은 새로움의 크기입니다. 새롭다는 것은 기존과 다르다는 말이고, 기존과 다른 정도가 클수록 충격이 커지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여기 <다크 나이트>의 오프닝 씬은 기존과 무엇이 그렇게 다릅니까?


먼저 조커의 사실적인 페이스 페인팅이 다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히어로 영화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해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의 방향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he brought the characters into the realm of realism). 하얗게 분칠해진 잭 니콜슨의 조커보다 군데군데 페인팅이 벗겨진, 그래서 더 기괴한 히스 레저의 조커 분장이 훨씬 사실적으로 느껴지죠.


영화 초반에 작은 반전이 제시되는 것 또한 새롭습니다. 우리는 은행 강도들의 대화를 통해 그들은 조커가 고용한 악당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는 건 조커는 그들에게 지령을 내리고 어딘가 멀찍이 떨어져 있다는 얘긴데, 알고 보니 조커가 직접 범죄 현장에 있었군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알고 보니 조커더라, 하는 반전에 놀라고, 그의 무계획성과 과감함에 또 놀라게 됩니다. 보통 악당은 함정을 파거든요. 그런데 조커는 함정을 파는 전형적인 악당이 아닙니다. 혼돈을 만들고 자신도 그 혼돈 속에 참여하는 악당이죠. 그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캐릭터로 다가옵니다.


<다크 나이트>는 히어로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의 오프닝은 충격적이거나 장식적인 것이 좋습니다. 관객의 이목을 한 번에 끌어서 이야기의 롤러코스터에 자발적으로 탑승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한 <비포 선라이즈>가 일직선으로 달리는 기차 위의 두 남녀에 대한 이야기라면, <다크 나이트>는 종횡무진하는 롤러코스터 위의 세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죠.


자, 그럼 다시 카뮈의 문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다크 나이트>의 오프닝은 어떤가요? 대단히 뻔뻔하면서 충분히 충격적입니다. 조커라는 인물을 파격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압도적이죠. 그럼 사건의 진행에 관해선 어떻습니까? 카뮈가 제시한 첫 문장은 분명히 모든 요소들을 갖추면서도 뒤에 있을 사건의 중요한 전제이기도 했거든요. 은행 강도 사건이 <다크 나이트>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나요?


아쉽게도 아닙니다. <다크 나이트>의 핵심은 선과 악이 모호해지는 지점입니다. 하비 덴트가 등장하고, 조커와 배트맨이 갈등하며 여러 가지 윤리적 딜레마와 관련된 질문을 던집니다. <다크 나이트>가 풍성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고, 그토록 찬사를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히어로 영화의 스펙터클과는 별개로 놀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조커가 등장하는 오프닝은 이런 딜레마와 큰 관련이 없습니다. 이야기의 주제에 봉사하지 않는 것 같아요. 놀란 감독은 효율보다는 충격을 선택했습니다.


그럼 이제 세 번째 영화를 보겠습니다. 이견의 여지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오늘 엄마가 죽은' 오프닝 어워드의 우승자는 샘 멘더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입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두 인물,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첫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프랭크가 묻습니다. 무슨 일 해요(So, what do you do)? 에이프릴은 배우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고 대답하죠. 이번엔 에이프릴이 같은 질문을 프랭크에게 합니다. 프랭크는 이때 농담을 던집니다. 난 항만노동자예요. 그리고 다음 주엔 더 멋진 일을 할 거라고, 식당의 야간 직원으로 일한다고 말하죠.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고 농담으로 무마합니다. 이건 그의 직업에 대한 스스로의 냉소입니다.


뒤에 나오지만 그는 자신의 지루한 직업을 부끄러워하거든요. 자신의 아버지는 평범한 세일즈맨이었습니다. 프랭크는 당시 생각했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되진 않을 거야(I hope to Christ I don't end up like you). 하지만 그는 지금 아버지와 똑같은 회사에서 똑같은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프랭크라는 인물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패배감.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지는 않을 정도의 적당한 비겁함.


하지만 에이프릴의 질문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돈 버는 일 말고요, 무슨 일을 좋아하냐고요(I don't mean how you make money. I mean, what are you interested in)?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에 프랭크는 직업을 말하는 사람인 반면, 에이프릴은 관심사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나 다릅니다. 그리고 영화는 두 사람의 차이를 아주 간단한 대화에서부터 효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퀀스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오프닝을 탁월하게 만듭니다. The Ink Spots의 'The Gypsy'가 배경음악으로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몇 년 후로 건너뜁니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이미 결혼한 모양이네요. 그런데 에이프릴은 자신이 준비한 연극을 망친 것 같습니다. 프랭크는 위로의 한마디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공연이 실패한 것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잘했다고 칭찬하기에는 너무 빈말처럼 보이고, 그렇다고 공연이 별로였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죠.


"그렇게 대단한 공연은 아니었던 것 같네." 프랭크는 나름의 말을 전하지만, 위로는 가 닿지 않습니다. 둘의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거울 너머로 대화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네요. 다음 장면에서,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긴 복도를 걸어가는데 이때 에이프릴이 프랭크의 조금 뒤에서 걷고 있습니다. 덕분에 빛과 그림자가 두 사람을 반대로 비추게 되었습니다. 둘은 한 번도 같은 빛 아래 서지 못합니다. 두 사람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정말 멋있는 연출이에요.



그리고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합니다. 대화는 완전히 틀어집니다. 이때 눈여겨볼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 별안간 차에서 내리는 에이프릴의 행동과, 에이프릴을 향해 주먹을 들어 올리는 프랭크의 행동입니다.


앞서 말했듯 에이프릴은 현실보다 이상을 좇는 사람입니다. 영화의 뒤에 나오는 인상적인 대화가 있습니다. 에이프릴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파리로 옮겨 새로운 삶을 살기를 꿈꿉니다. 프랭크는 에이프릴에게 그건 현실적인 생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It's just not very realistic). 그러나 에이프릴은 현실에 안주하면서 사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 아니라고 말하죠(This is what's unrealistic). '현실'을 이해하는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태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에이프릴은 탈출하려고 합니다. 뉴욕에서 파리로, 집 안에서 집 밖으로, 차 안에서 차 밖으로. 영화 내내 에이프릴은 파리로 가려고 하고, 영화 후반부에 집을 나가 숲속을 달리고, 영화의 오프닝에선 차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분명 이건 하나의 끈으로 꿰어집니다. 멋진 반복입니다.


한편 프랭크는 남성성에 대한 집착을 보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에 매우 격분하죠. 위의 영상에서 에이프릴이, '당신을 남자라고나 할 수 있을까? (you can call yourself a man?)' 라고 하자, 프랭크는 바로 에이프릴을 때리려고 하죠. 이런 설정은 영화에서 정신질환자로 등장하지만 그래서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존 기빙스의 대사로 다시 반복됩니다. 그는 '임신만이 프랭크가 남자임을 (혹은 그만한 배짱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making babies is the only way he can prove he's got a pair of balls)'이라고 일갈합니다. 이 대사 이후 프랭크는 그에게 주먹을 들고 달려듭니다.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욕하는 것은 프랭크의 뇌관을 건드리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비겁하기 때문입니다. 프랭크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다르게 살 것이라 되뇌어왔던 아버지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 삶을 사는 자신을, 그저 앓고만 있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곧 벗어나야 할 그림자이고, 자신의 지루한 모습이면서, 마음 한구석에 던져 놓고 모른 체하고 있는 비루한 그의 진짜 정체성입니다. 그는 그 정체성을 들키면 곧바로 분노합니다.


확실히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오프닝은 작은 힌트들을 뿌려놓았습니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들 말입니다. 힌트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하나씩 쌓입니다. 그러면 어느새 프랭크와 에이프릴이 실제 살아있는 것 같은,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오프닝이 더욱 효과적인 이유는, 두 인물의 달콤한 만남과 쓰라린 현재를 이어 붙여놓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두 인물이 천천히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줄 수도 있었고 혹은 바로 다투는 장면에서 시작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뻔하고요, 뻔하면 언제나 지루해지는 법이죠. 영리하게 보여주는 방법은 행복했던 과거와 그렇지 않은 지금을 바로 이어서 보여주는 겁니다. 두 시간 사이에 아무 사건을 묘사하지 않을수록 시간 사이의 거리감은 극대화됩니다. 간극이 멀수록 파괴력이 강해진다고 말했었죠? 이런 극적인 대비는 우리에게 얼마간의 충격과 재미를 전달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야기의 진행 방향을 암시합니다. 오프닝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행복했던 예전과 그렇지 않은 지금. 불같은 언쟁과 비난. 차 안에서 차 밖으로 탈출하는 에이프릴.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참지 못하는 프랭크. 그리고 수습되지 않는 갈등. 오프닝이 지나고,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계속 보다 보면 이 오프닝이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했던 예전과 그렇지 않은 지금. 불같은 언쟁과 비난. 뉴욕에서 파리로 탈출하고자 하는 에이프릴.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에 분노하는 프랭크. 그리고 역시나 수습되지 않는 그들의 현재.


오프닝이 영화 전체에 대한 은유로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비포 선라이즈>처럼 대사로서 인물의 성격을 명확히 제시하면서, 오프닝이 영화의 소제목처럼 자리하고 있어요. 동시에 인물의 변화를 극적으로 대비하면서 관객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다크 나이트>의 전략과 마찬가지로요. 효율과 충격.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하려고 애쓴 오프닝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영화 오프닝이 <비포 선라이즈>나 <다크 나이트>의 오프닝보다 더 낫다. 이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프닝을 영화 전체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는 없겠죠.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 전체와 잘 어울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오프닝이 필요에 맞게 위치했는지가 더욱 중요하죠. 말하자면, 모든 요소를 갖춘 오프닝이 좋은 오프닝인 것이 아니라, 좋은 오프닝은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춘 오프닝이라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세 영화의 오프닝은 무척 뛰어납니다. <비포 선라이즈>는 충격이 필요하지 않은, 다큐멘터리와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효율을 선택한 것이고, <다크 나이트>는 히어로 영화이기 때문에 장르를 고려해 충격을 선택한 전략이 매우 훌륭하게 적중했습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리처드 예이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1950년대 미국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극적인 드라마를 완성하고자 효율과 충격 모두를 한 손에 쥐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효율과 충격, 충격과 효율은 이야기를 멋지게 시작하는 전략입니다. 많은 이야기 작법서에서 효율과 충격은 다른 말로 설명됩니다. 인물을 대사로 보여주라든지, 입체적인 인물을 구축하라든지, 뜬금없이 시작하라든지 아니면 스토리의 시작과 끝을 뒤집으라든지…. 이런 것들은 구체적인 방법론입니다. 하지만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두 가지입니다. 효율 혹은 충격. 세심하든지, 놀라게 하든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우리가 소설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영화로 이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감상하는 건 사람의 감정으로 하는 즐거움인 탓에, 예술의 특정한 표현 양식을 초월하여 결국은 내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가 훨씬 중요한 법입니다. 뻔뻔한 태도로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누구에게나 흥미롭습니다. 일관된 주장과 사려 깊은 대답은 누구에게나 진심을 전달하죠. 그렇다면 효율과 충격, 두 가지 전략은 사실 하나일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이것이 유일한 전략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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