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sson In Storytelling #1
※ 영화 <시>(2010), <패터슨>(2016)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창동의 <시>와 짐 자무시의 <패터슨>에는 시를 쓰는 사람이 나옵니다.
양미자와 패터슨 이야기입니다. 둘 다 시를 씁니다. 시를 쓴다는 건 문학 창작 활동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문학 창작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시>의 양미자는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지만, <패터슨>의 패터슨은 점심을 먹는 와중에 뚝딱 시를 씁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 창작의 두 가지 다른 태도에 대한 힌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양미자의 진심을 다하는 태도, 패터슨의 기대하지 않는 태도. 두 가지 다른 태도 말입니다.
진심을 다하는 태도로 시를 쓰면 양미자처럼 쓰게 됩니다. 그는 시를 써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단순히 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기가 시인 기질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죠. 그랬던 사람이 자신의 진심을 다한 시를 쓰기 위해서 손자를 경찰에게 넘기고 자신을 다리 밑으로 던집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의 다짐이자 결기입니다. 피해자에게 사죄를 바라는 한 사람의 무거운 진정성입니다.
그 진정성이 우리를 흔듭니다. 진심을 다하는 태도는 진정성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은 관객에게 인물의 진정성을 설득하기 위해 사건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사건, 즉 기승전결의 수직적 고저를 통해서 그 고저의 깊은 폭만큼 진정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시는 진심을 더불어 써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습니다.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 씨 밖에 없다'는 대사는 사건을 겪고 난 사람만이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이창동 감독의 굳은 선언입니다. <시>에서의 시인은 양미자 단 한 명이라는 외침이에요. 양미자는 자기 자신을 시로 대체합니다. 그의 삶이 시가 되고 시가 그의 삶을 대표하게 됩니다.
진심을 다하는 태도의 문학은 쓰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덮쳐서 가치의 지표를 흔들고 세속의 기준을 파괴합니다. 독자는 쓰나미의 물결 앞에서 몰락하는 인물과 함께 가차 없이 휩쓸립니다.
반면 기대하지 않는 태도로 시를 쓰면 패터슨처럼 쓰게 됩니다. 기대하지 않는 문학의 특징은 가벼움입니다. 가벼운 일상의 언어로 구성된 시는 여유롭고 느긋하면서 내내 산뜻합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 같습니다. 발목까지 발을 담그고 깊은 고민이나 흔들림 없이 현재의 느낌 그 자체에 집중합니다.
이런 기대하지 않는 태도의 시를 어떻게 영상화할 수 있을까요? 짐 자무시 감독은 기대하지 않는 태도를 고저 없는 수평적 반복에서 발견합니다. <패터슨>에서 우리는 특별한 사건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패터슨과 마빈이 늦은 밤에 마주친 흑인 무리는 개에게 수갑을 채우라며(cuff that dog) 겁을 줍니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경고에 그치죠. 전기 문제로 버스가 고장 난 다급한 상황에서 패터슨은 휴대폰이 없어 당황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승객 중 한 명에게 휴대폰을 빌려 문제를 해결해요.
바에서 벌어지는 위험한 장면은 긴장할 새도 없이 허무하게 해결되고, 패터슨의 노트가 갈가리 찢어지지만, 곧 가능성으로 가득 찬 새 노트를 선물 받습니다. <패터슨>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사건으로 가던 길목에서 소동으로 그칩니다. 이들 소동은 주인공인 패터슨을 수난에 빠뜨리는 필연적 사건이라기보다는 매일의 리듬 속에 끼어드는 우연한 소동이라고 해야 알맞습니다.
만약 사건이 있다면 패터슨은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고, 가치관의 변화를 겪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건 대신 소동이 있습니다. 소동은 극적인 서사 대신 사적인 일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은 무심하게 반복되는 것이죠. 그는 일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패터슨>에서 쌍둥이가 여러 번 등장하고 많은 장면이 비슷하게 변주되는 것은 영화 자체가 반복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을 부유하는 패터슨의 태도는 세상과의 관계에 심드렁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 씨 밖에 없다, 이 대사는 나를 바쳐서 세상의 심연을 바라보려는 야심을 드러냅니다. 세상을 바라보려는 야심과 세상을 신경 쓰지 않는 마음. 훌륭한 창작자는 두 태도의 긴장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개의 태도는 대립하기도 하고 보족하기도 하면서 좋은 창작물의 탄생에 기여합니다. 양미자와 같이 진심을 다해 창작에 임할 수도, 패터슨과 같이 아무런 기대 없이 창작에 임할 수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두 태도의 극단에서는 주체가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양미자가 손자를 경찰에게 보내고 자신의 몸을 던진 이유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자신의 손자가 가해자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양미자는 옳은 것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삶에서 옳은 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진심과 시 창작 과정에서 진심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 공명하는 순간, 진실에의 끝없는 추구만이 남고 양미자 그는 사라집니다. 자신의 삶보다 중요한 것은 단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패터슨은 무위의 태도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반복은 주체를 약화시킵니다. 발터 벤야민은 '원작을 재현하는 것은 (...)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약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말합니다. 시를 쓰는 일이 되풀이되는 상황 속에서 패터슨이 시를 쓰는 일 자체의 의미는 줄어듭니다. 그저 쓰는 것이지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말입니다. 자신이 시인이냐는 질문에 패터슨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패터슨은 시인으로서의 주체성이 거의 없습니다. 시인으로서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어요. 그러니 시집을 출판하지도 않는 것이죠.
진심을 따라가다 보면, 기대를 하지 않다 보면 결국 주체성이 자연스럽게 지워집니다. 자기애를 경계하고 자의식을 비우게 됩니다. 뛰어난 예술이라면 거기엔 필연적으로 주체성이 제거되어 있습니다.
아래의 시는 '추석 달'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뉴욕에서 보는 추석 달 속에
코스모스 무리지어 핀
고향 철길 있네
장독대 뒤에 꽈리 한 타래
가을 볕에 익어 있네
가난이 따뜻하고 아름답던
성묫길 소슬바람 송편 향기
마천루 달 속에서 물씬거리네
함지박에 가득 담긴
머루 다래 수수 차좁쌀
쪽머리에 이시고
흰 옥양목 적삼의 어머니 계시네
울음 때문에 바라볼 수 없는
어머니 모습이네
어떤가요? 괜찮은 시인가요? 대체로 건조하게 쓰였지만 몇 군데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가난이 따뜻하고 아름답던'이 그렇습니다. 어릴 적의 가난을 따뜻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시선은 과거를 미화하고 현재를 처량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이런 장치는 작위적입니다. 작위는 곧 화자를 드러냅니다. 때문에 주체성의 다른 말은 작위입니다.
'울음 때문에 바라볼 수 없는 어머니 모습'도 그러합니다. 지금 내가 슬프다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직접 서술하고 있습니다. 내 슬픈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순간 나는 무언가를 의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시어의 자리에 화자의 부담스러운 의식이 들어서게 됩니다. 스스로에 대한 동정은 결국 화자의 진심을 퇴색시켜요. 진심을 다하는 태도와 기대하지 않는 태도, 두 가지가 잘 발견되지 않습니다.
한편 아래는 같은 제목의 다른 시입니다. '추석달'입니다.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보이로 어서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 먹자, 그렇제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던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 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이 시를 읽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화자의 진정성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 없이 그저 그때의 일을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이라는 말은 그때 있었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할 뿐입니다. 무위의 기교로 지상의 한 순간을 스크랩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건조하게 이야기하자 그 자리에 독자의 감정이 들어섭니다. 설득력을 가집니다.
우리는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흐느껴 울던 누나의 마음과 화자의 안타까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독자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독자는 설득됩니다. 독자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을수록 독자는 능동적인 해석을 합니다. 해석 과정에서 화자의 진심을 발굴합니다.
양미자와 패터슨의 시 창작 과정은 어떻게 좋은 창작물을 만드는지에 대한 좋은 예시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문학 작품에 매료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진심을 전하면서 동시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작품들에, 우리는 끌립니다. 뛰어난 문학 작품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독자를 설득합니다.
한편, 문학 창작의 태도로 설명했지만, 문학은 마음과 관계하는바, 좋은 문학은 언제나 독자의 마음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좋은 문학은 설득의 교과서입니다. 그리고 그 설득의 기술은 진심을 다하면서 기대하지 않는 양미자와 패터슨의 태도와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글을 쓸 때도, 누군가를 설득할 때도, 관중 앞에서 흡인력 있는 발표를 해야 할 때도 효과적인 마음가짐입니다. 우리가 진심을 다했던 양미자에게 감화되고, 기대하지 않았던 패터슨에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처럼, 우리의 삶 도처에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 태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