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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냥이 Apr 1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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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한다


내 작은 추억을 허락없이 도용해서 좋아요 몇개 받자고 자기 SNS에 전시한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함께 놀았던 친구를 가난하다며, 우리와 다르지 않냐며 연락을 불편해 한다.

둘이 동네에서 만날 때 편히 입고 온 차림새를 보더니 츄리닝 바지는 좀 그렇지 않냐며 지적한다.

오랜만에 만나서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내 고용여부와 연봉이 얼마나 올랐는가를 묻는다.

자신이 나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며, 나를 챙겨주며 생각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뱉는다.

 

이 사람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에겐 이게 너무도 습관적이고,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이 사람은 자신의 삶에 진취적이고, 항상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누군가에겐 자랑스런 가족이고, 존경할 만한 선배이다.

이 사람은 알게 된 지 10년도 넘은 사람이다. 

 

나는 한 때 이 사람과의 관계를 친구라고 정의했다. 

언제부터 관계가 이렇게 됬을까도 생각해봤지만 답이 안나온다.

사람이 변했다고? 글쎄.. 

확실한건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자기다워졌을 뿐이다.


이 사람은 나름대로 나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지만 그 호의는 불편할 뿐이었고, 여러모로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내 삶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란 느낌이 분명해졌다. 결국 나는 어떤 큰 다툼이나 계기도 없이, 이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생각해보면 마음은 한참전에 돌아섰는데, 그래도 변할거라며, 그래도 오래된 친구라며 손을 놓지 못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더 빨리 끊어내지 못했나 시간이 아깝다.


나는 이 사람이 그가 추구하는 삶에 어울리는 사람들 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과거에 인연 따위 까맣게 잊고 지낼 정도로 그 즐거움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오늘 저녁 일을 끝내고 휴대폰을 확인하니 모르지만 아는 것같은 집전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두번이나 와있었다. 이 사람의 핸드폰을 차단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신경한 표정을 하며 "발신자 차단" 메뉴를 찾아 버튼을 누른다. 


어떤 망설임도 없이.



 



응답한다


사회에서 만난 형이 한 명 있다. 한 때 내가 스태프로 일하던 중고서점에서 새로 오픈할 부산점 직원으로 교육을 받으러 온 그 형은 나와 겨우 한달 동안 시간을 보냈다.


별 뜻없이 교환한 전화번호에 자긴 새벽에 전화할 수도 있다며 대뜸 요상한 어필을 한다. 아무 기대도 안되는 말. 그 때는 시덥잖은 농담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는데, 놀랍게도 그 해 사람도 없고 스케줄도 없었던 설 연휴, 그 형은 대뜸 나를 불러내 자비로 영화관람과 저녁을 베풀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 근무중 내가 형에게 영화 ‘싱스트리트’의 시끄러운 OST를 좋아한다 말했더니, 그대로 매장 BGM으로 재생해버린 적이 있었다. 덕분에 그날 우린 매니저님에게 혼이 났었다. 


형과 함께한 1개월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내 직장을 찾겠다며 중고서점에서 퇴사했고, 그 형은 부산점으로 돌아가면서 관계는 끝날 줄 알았다. 의외로 먼저 연락을 한 인간은 나였다. 그리고 나서 구한 직장 생활이 생각보다 힘들었기에 나는 형에게 자주 전화를 해 징징대곤 했다. 분명 귀찮았으리라.. 하지만 형은 그 흔한 ‘나때는 말이야’ 등의 꼰대 질도 없이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 후 1년 2개월을 참아낸 나의 퇴사 결정에도 역시 형은, 어떠한 판단도 평가도 하지 않았다.


커리어, 돈, 발전과는 상관이 전혀 없이 그냥 좋아서하는 내 글쓰기 취미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형은 진심으로 내가 부럽다고 했다. 자기도 블로그에 글쓰기를 시작했고 쓴 글을 봐줬으면 한다며 우린 서로의 글들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 때 이 형과 관계를 "남"이라고 정의했다. 남이라고 해도 이상할건 없다. 고작 1개월 만났고,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지도 3년이 훨씬 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왠지 지금은 이 형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나의 하나 뿐인 랜선브로. ” 


최근 우리의 근황은 이렇다. 나는 단편집에 들어갈 소설 하나를 써내는 프로젝트를 수행해 출간을 앞두고 있고, 그 형은 최근 실연을 겪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마음 정리를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소설을 쓰고 있다. 그나마 뭔가 써낸 적이 있는 놈이라고 내게 자주 피드백을 요청하는데, 귀찮긴 하지만 내가 힘들 때 그저 들어주었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돕고 있다. 언젠가 약속을 잡아 얼굴을 보게 된다면, 각자의 손에 있는 서로의 책을 교환했으면 좋겠다.

 

또 전화벨이 울린다. 

이 형이 최근 겪는 실연 얘기는 왠지 질리지 않는다. 

웃으며 인사를 교환한다.


What UP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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