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가수 J입니다.
벌써 10번째.. 아무도 없는 이 무대에서 인사를 하고있지만
늘 적응이 안되고 어색하네요.
방금 들려준 오프닝 곡은 마음에 들으셨나요?
이번 공연을 위해서 특별히 새롭게 편곡을 해봤어요
가끔 이런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은... 어려운 시기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항상 발전해서 이 세상에 뭔가 새로운걸 보여주는게 제 역활이니까요.
다음 곡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지금 이 무대 위에 서있는 저는 어릴 때부터 가수라는 오랜 꿈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 꿈을 위해 분명한 목적을 갖고, 분명한 태도로 살아왔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 원하는 음악을 전공했고
항상 치열하게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함께 해왔습니다.
그랬던 덕분에 저의 커리어에서 유의미한 업적들을 남기며
항상 정진한 덕분에 최고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죠.
열심히 달려온 삶에 후회도 없었으며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죠.
생각해보면 참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
제 입장에서는 세상의 모든 관객들이 갑자기 없어져버린 대량의 행방불명...
“필터링” 이라고 불리는 그 사건이 발생하기 전의 얘기지만요.
저와는 반대로 누군가를 따라가고,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고, 누군가를 위해 소비해왔던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삶을 살아온...
저의 무대에서 관객이었던 당신들이 어느날 갑자기 발생한 "필터링"으로...
말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져버린지 10년이나 지났어요.
그 “필터링” 이란 사건이 어떤 이의 의도와 기준으로..
그리고 도대체 어떠한 방법으로 일어났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필터링" 직후 이 세상에 남게된 생존자들이 다 하나 같이 자기 잘난 맛에 살았던
자기 분야에서 최고인 비범한 전문가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때...
"필터링"을 계획한 누군가는 그들 중 한명이며
당시 세상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
애매한 일상을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몹시 거슬렸고,
그들을 필터링의 타겟으로 삼은게 아닐까....추측할 뿐이에요.
받아들이기 힘든 초현실적 재난 앞에서
생존자로 선택되어 살아남은건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필터링"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어째서 특별하지 않은 삶... 애매한 삶이 나쁜걸까요?
세상에서 애매한 삶들이 사라지는게 정말 옳은 일이었을까요?
그래서... 그 누군가의 의도로 특별한 사람들만 살아남게 된 이 세상은
과연 10년 전보다 더 특별해졌을까요?
결과부터 말하자면
아뇨, 형편없어졌습니다.
단적인 예시지만, 제가 지금 하고있는 이 "단독" 공연만 봐도 알 수 있죠.
무대 위에 서 뽐낼 줄만 아는 특별한 존재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 따위..
사실상 아무 의미없더라구요.
세상에 가수 하나만으로 완성되는 무대는 없는 겁니다.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반주를 해주고, 누군가는 무대 아래서 관람을 해줘야하죠.
그런데 이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최고”분들은 좀처럼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갖거나
다른 이를 빛내주는 것에 대해서 아예 흥미 자체가 없더라구요.
누군가의 관객이 된다는 것을 평범해지는 것으로 간주해 그랬는지도 모르죠.
더 나아가서, 혹시라도 또 한번의 “필터링”이 발생할 때.
스스로 평범해져버리면
자신도 살아남을 수 없겠다는 암묵적인 두려움 때문일지도요...
어쨋거나 결국 그렇게 살아남은 “최고”들은
결국 각자가 최고로 남기위해, 특별해지기 위해서 뿔뿔히 흩어져 살게 되었어요.
지금 그 인간들은 어디서 뭐하면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요.
이젠 사라져버린 관객 여러분이
혹시라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며
저를, 지금 이 무대를 보고 있다면 이것 하나만은 알아줬으면 해요.
이 도시에 거주하는 유일한 인간이자, 유일한 가수가 되어버린
저는 저의 관객이었던 애매한 당신들을 세상 무엇보다도 그리워한다는것을요.
사방이 빛으로 밝혀진 곳에서 빛추는 조명이 무슨 의미있을까요?
사방이 소리로 가득찬 곳에서 부르는 노래가 무슨 의미있을까요?
때로는 집중하고, 때로는 환호하며
조명이 닿지 않는 무대 밑 객석에서 자리를 지켜주던 당신들을 떠올릴 때면
애초부터 이 공간, 이 무대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노래와 이야기를 즐겨줄 애매한 당신들이 없으니
이곳이 아무리 넓고 멋진 무대여도 전혀 무대가 아닌 것 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1년에 한 번...
이렇게 세상에 없는 당신들을 추억하는 이 공연을 벌써 10번째 하고 있어요.
한 때 국제 올림픽 개최지로도 쓰인적 있던 이 무대의 장비들을 이용해서
전 세계의 방송, 통신기기 매체에 제 공연의 영상, 음성을 송신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저의 이 공연이 작은 기적을 일으켜서
필터링을 계획한 이름도 모를 누군가가 마음을 바꿔 우리에게서 빼앗어간
애매한 사람들을 되돌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
거기, 듣고 있나요?
.....
듣고 있을거라 믿겠습니다.
하다보니 얘기가 길어졌네요.
자, 그럼 다음 곡.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