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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역 3번 출구 신호등이 바뀔 때

<일기>, 황정은 작가의 그 문장 그리고..

나는 내가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걸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는
늘 얼마간 책임을 지는 일로 느껴진다.
<일기>, 황정은

책임질 수 있는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 영화감독 윤가은-
인터뷰집 <내일을 위한 내 일> 중




"내리세요? 그럼 저 먼저 나갈게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사당역에 내렸어요. 서울로 외출할 때면 지나가는 곳인데 출·퇴근 시간은 장난 아니에요. 여의도로, 서울대로, 강남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 수원이나 용인 등 경기 남부로 향하는 광역버스와 버스, 지하철이 뒤엉킨 복잡한 곳이에요. 교통이 편하지만, 사당역은 사람 많고 복잡한 곳이죠.



여기서 내리면 어김없이 큰 사거리를 지나가야 해요. 음... 이건 신호등 앞에서 꽤 오랫동안 신호를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예요. 사람이 많아서 횡단보도 앞까지도 빠른 걸음으로 가지 않으면 신호를 놓칠 수가 있거든요. 버스에서 내리면 초초한 마음으로 횡단보도의 신호를 바라봅니다.



 차량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면, 도로의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어 건너갈 수 있다는 것! 이 시간이 전 초조해요. 빨리 건너가야 할 땐 느릿느릿하 신호가 안 바뀌고, 때론 너무 빨리 숫자가 사라져 버리니까요. 어설프게 시간이 남았을 때 고민이 극에 달하죠. 이때부터 숨 가쁜 고민이 시작돼요. ‘뛸까? 말까? 뛰면 이번 신호에 건널 수 있을까? 아니면 조금 느긋하게 다음 신호를 기다릴까?’



아, 어떡해!!! 숫자가 빠르게 사라지더니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었어요. 아~ 조금 더 빨리 뛸 걸 그랬나 봐요. 내리자마자 조금만 빨리 뛰었다면..... 근데 이상하죠?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빨간 불이거나, 파란 불이거나. 겨우 두 가지 경우밖에 없는데, 0X 문제처럼 선택지가 딱 두 개뿐인데, 왜 신호등 앞에 서면 고민이 많아지는 걸까요? 남들 눈엔  건넜거나, 못 건넜거나 둘 중에 하나뿐인데 말이죠.




가끔은 내 마음이 신호등.... 아니, 미친 신호등 같아요. 켜졌다가 꺼졌다가, 켜졌다가 꺼졌다가..... 결론은  하거나, 말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그 잠시를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온갖 것들이 날뛰거든요. 할까? 말까? 합격, 불합격, 갈등, 불안, 망설임, 초조, 기대, 실망, 시기, 희망을 다 품고 있어요. 수면 위에 우아하게 뜬 백조의 물아래 분주한 발짓처럼 속 시끄러운 마음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지만 이게 진짜 내 모습이겠죠!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는 건, 두 가지 신호등 색깔뿐이겠지만. 지금도 깜빡이는 저 신호등 색깔처럼 말이죠.




어.... 드디어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켜졌어요. 전 그렇게 신호등을 건너 친구들 모임에 왔어요. 심심해서 친구들 사주를 봐줬어요. 3개월 정도 배워서 선무당 정도는 되거든요.  앗! 그런데 이건 뭐죠? 평소 리더십 있고 행동 빠르고 결정 잘하는 친구의 사주가 화(火) 그중에 음화, 가냘픈 촛불이에요. 그만큼 여리고 섬세하고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체질'이라는 거. 그동안 정말 몰랐거든요.  



또 다른 친구의 사주 역시 반전이에요.  말투도 어린아이 같고, 약속 장소를 정해도 혼자 올 수 있을까 늘 보살펴야 하는 친구. 도와달라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도와주고 싶은 타입인데...... 완전 대박! 이 친구 사주는 온통 토(土)로 뒤덮여 있어요. 생각보다 무던하고 은근 잘 버티는 타입이라니! 오히려 이 친구는 걱정할 것 없이 그냥 놔두면 되는 타입이었던 거예요.  



왜 지금껏 두 친구를 거꾸로 알고 있었던 걸까요? 아.... 보이는 게 다는 아닌가 봐요. 지금껏  안다고 생각한 친구들 모습은 뭘까요. 친구가 겉으로 보내는 신호등 색깔 너머의 사잇길에는 수많은 수신호가 있었을 텐데, 그걸 놓치고 결정된 신호등 불빛만 보고 그들을 안다 건방진 생각을 했나 봐요. 아!  두 친구의 사주를 보면서 빨강과 파랑 신호등이 거꾸로 바뀐 것 같은 이 기분! 대체 뭐죠? 그런데도 왜 난, 다 안다고 확신했던 걸까요? 




집에 갈 시간이에요. 저는 또 사당역 3번 출구 앞, 신호등 앞에 서 있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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