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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데의 여행

<아침의 피아노>, 김진영 작가의 그 문장

99.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234.
내 마음은 편안하다 

- 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  -  


난 노비타 비데 

나는 노비타 비데야. 내 고향은 천안. 천안공장에서 만들어진 후 주문이 들어오면 전국으로 보내지지. 어제 내 옆에 있던 친구는 상자에 담겨 꽁꽁 묶어 포장되더니 자리를 떠났어. 늘 이별을 준비하기 때문에 나는 주변에 말을 걸지 않고 눈으로만 지켜봐. 어젯밤 내 옆과 뒤에 있던 아이들이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아니면 비어있는지를 보면서 내 출발을 점쳐보거든. 그런데.... 아침부터 내 주변이 소란스럽네. 어? 내가 들어 올려졌어. 나, 이제 이곳을 떠나나 봐.     



여행이 시작되었어 

내 짐작이 맞았어.  떠날 준비를 하는 거였어. 곧바로 상처가 나거나 깨지지 않도록 숨 막히게 여러 겹의 비닐로 싸더니 스티로폼 안에 단단히 가두는 거야. 그리고 트럭에 태웠어. 들썩들썩~ 벌써 여러 번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지 뭐야. 꽤 속도를 내는 걸. 이게 말로만 듣던  고속도로인가.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걸까. 한참을 그렇게 가다가 어딘가 멈췄어. 잠깐, 다른 트럭으로 옮겨졌는데 바깥을 보니 어두워졌어. 아마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가는 분위기 같은데, 우선 잠이나 푹 자둬야겠어.      




잘못 배달되었다고

다음날 오후, 어느 아파트 경비실에 도착했어. 휴~ 드디어 피곤한 이틀간의 여행이 끝나고 목적지에 도착했나 봐. 이제 어느 집 화장실 안에 정착할 일만 남았군.  “뭐가 왔던데요” “네 가져갈게요”  그런데 이상해. 도착했으면 얼른 상자를 뜯고 내 얼굴을 봐야 하는데 이거 뭐지? 시간이 지나가는데도 포장한 상태 그대로 방치하고 있어. 뭔가 잘못된 건가. 나를 얌전히 그대로 두고 전화하는 소리가 들려.   

   

"아버님 집 비데가 고장 났다고 주문한 거 있잖아그게  우리 집으로 왔어주소를 잘못 쓴 거야아니라고"

잠깐만. 이상하다. 아파트 동호수는 아버님 집인데위에 주소가 우리 집이야주소가 반반씩 섞여 있는데이런 경우도 있나다시 보내라고알았어! ” 


이런! 잘못 도착한 거였어. 천안에서 경기도까지  힘들게 왔는데 여기가 아니래. 아이~C.

     


       

#비 오는 날우체국 

전화를 끊고 나를 들더니 차에 싣는 소리가 나. 아!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떠나야 한다는 거야. 잠깐 가더니 멈췄어. 다시 나를 내리는데 상자 위로 툭툭 물방울이 떨어지는 져. 아마 비가 오나 봐. 아이~ 빗물에 다 젖겠네. 속상해라~. 속상한 기분도 잠시, 상자 위에 붙은 택배 용지를 쭈~욱 뜯는 소리가 들려. 그러더니 쓰윽쓰윽 글씨를 쓰더니 뜯어진 스티커 위에 새로 스티커를 붙이는 거야.       


“ 물건이 잘못 와서 다시 택배 보내려고요~” 

“ 꽤 나오는데요만 2천 원이에요”

“ 왔다 갔다 택배비만도 비싸네요오늘 보내면 충주까지 얼마나 걸리나요네 빨리 보내주세요”           



            

#주인을 못 만났어 

충주? 경기도에서 충주로 또 떠난다고? 여기서 대체 얼마나 걸리게 될까? 찝찝한 기분에 젖어있다가 이틀간의 여행 동안 피곤했던 나머지 깜빡 잠이 들었지 뭐야. 그래서 지난번처럼 지루하지는 않았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야. 어휴~ 이제야 제대로 상자 밖으로 나와 제대로 숨 쉴 수 있겠군. 그런데 여기도 좀 이상해. 너무 조용하잖아. 여전히 상자를 뜯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어. 또 잘못 온 거야? 아니면 집에 아무도 없는 건가. 이어지는 전화통화 소리.      


할아버지 119 타고 응급실에 가셨어요그냥 집에서 넘어지신 줄 알았는데말씀하실 때 혀가 마비되신 것 같더라고요. 택배가 하나와 있던데아... 이게 그때 말한 비데예요? 현관에 내놓으라고요”     




다시현관밖에 놓인 나

결국, 난 여기서도 주인을 만나지 못했어. 나의 주인이 될 뻔한 할아버지는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셨대. 당분간 집에 못 오실 것 같다는 이야기와 함께 난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얌전하게 아파트 현관문 밖에 내놓아졌어. 그날 밤도 다음 날도 난 제자리.  아무도 나를 찾지 않네. 대체 이 집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덜컹, 덜컹. 잠깐 잠이 들었나 봐. 조용하던 복도에서 전화소리가 들려     


택배기사인데요밖에 내놓으셨다고요. 아무것도 못 봤는데... 현관문 밖에 있다고요. 잠깐만요이거예요? 박스가 우체국 택배라서 저희 게 아닌 줄 알았어요네 반품할게요.”      




# 비데의 1주일 여행기  

그렇게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박스에 갇힌 채 나의 일주일의 여행은 끝이 났어. 아마 내가 태어난 천안공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게 아닐까.  그나저나 이 집주인은 어디로 간 걸까?






주인을 만나지 못한 비데가 이리저리 여행하는 1주일 사이에 나는 또 다른 인생의 방지 턱 앞에 있다.

비데가 고장 났다는 시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시댁에 가서 모델을 확인하고 새 비데를 주문했건만. 배송지가 잘못 쓰여서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아버님이 쓰러지셔서 119를 타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급작스럽게 요양병원으로 거기서 다시 병원 중환자실로 가시게 되었다. 그사이, 주인을 만나지 못한 새 비데를 반품해야 했다. 주인을 만나지 못한 비데의 우여곡절 1주일이, 나의 무섭고 황망한 1주일처럼 느껴진다. 조금씩 아프긴 하셨지만 그날이 마지막이 될 줄을 몰랐다. 마지막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고 정리를 해오신 어른, 나의 시아버지 송명섭 님을 애도하며 이 글을 바친다. 그곳에서 편안하시고 편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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