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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빚쟁이로 남기고

황인숙 시인의 그 문장


- 황인숙 -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1. 4월 27일 17시 17분


세 개의 7이 겹치는 시간.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87년의 삶이 끝났다. 앞으로는 기일이라 불리겠지만 내겐 마지막 만남의 날로 기억된다. 전날, 중환자실로 들어가시는 걸 보고 서울로 올라온 남편. 중환자실은 코로나로 면회 불가였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 어제보다 상태가 안 좋아지셨다며 혹시, 가까이 계신 가족이 있느냐고 묻자, 지금 출발하겠다는 남편의 대답을 듣고 나도 같이 따라나섰다.


충주의 한 병원. 도착하자마자 만난 중환자실 간호사는 어제보다 상태가 안 좋고 청색증 등  몇 가지 징후가 있지만, 조금 호전될 수도, 며칠, 혹은 더 길어질 수도 있단다. 곧이어 담당 의사 면담을 신청했다. 의사는 훨씬 간결하게 말했다. 어제 위급상황은 넘기셨지만 몸 상태로 볼 때, 얼마 남지 않으신 것 같다고. 만약을 대비해 임종 코로나 검사를 받고 대기하시라고.


새로 지은 산속의 병원은 속절없이 산뷰였고 건너편으로 별장들이 보였다.  속속 도착한 삼 남매는 병원 바깥, 산뷰가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딴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슴이 조마조마해 웃으며 딴 이야기를 이어갔다. 간호사는 2시간마다 ‘비슷하다’. ‘계속 그 상태다’라며 바이탈 상태를 알려줬고, 오늘 하루는 넘기시겠구나 안도하던 찰나. 오후 5시 무렵, 중환자실 앞에 대기하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2. 남편이 처음 울었다


중환자 대기실. 면회는 두 명뿐이란다. 설마, 혹시, 어쩌면 하는 여러 생각이 스쳐 갔지만 울먹이며 내가 한 말은, “귀에 대고 사랑한다고 해 드려"였다. 정말 지금이 마지막이라면.... 청각은 끝까지 살아있다니까 꼭 전해드리고 싶은 말이었다. 단단히 감염 예방 복장을 한 형제가 들어간 지 10분쯤 지났을까. 먼저 나온 남편이 여동생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안는다. “돌아가셨어.” 남편이 처음으로 운다.


이 남자를 안 지 30년이 넘었는데 우는 걸 처음 본다. 울먹이다 띄엄띄엄 전해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자식들 목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렸고, 사랑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심장 박동수가 갑자기 빨라졌다가 할 일을 다 한 듯 훅 꺼지듯이 심장이 멈췄다고. 우리들은 각자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아무것도 실감 나지 않았지만, 임종을 지킨 것만으로 마지막 선물처럼 느껴졌다. 운구차가 도착할 때까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몸을 쓰다듬어 드린 후, 아버님을 실은 운구차가 장례식장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날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3. 산자를 위한 공간, 강변의 장례식장


고향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병원 장례식장 대신 선택한 장례식장은, 원래 가든이었던 곳으로 옆에 강을 낀, 이른바 강뷰 맛집이었다. 창문 너머 시원한 남한강의 풍경이 보이는 곳은,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면서도 산자를 위한 공간이 되어주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힘든 가족들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눈을 뜨면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큰 위로를 받았다. 어둡거나 스산하지도 않은 망자를 위한 공간. 조문객들도 이런 장례식장은 처음이라며 힐링하고 간다는 말을 전했다.


저녁 무렵 돌아가셔서 제대로 알리지 못했는데도 부고 소식을 듣고 첫날 달려와 준 사람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아버님의 친구 두 분이다. 아버님의 직속 후배이자 오랜 동료 교수인 백발의 안 교수님은 소식을 듣고 한밤중에 달려오셨다. 지난가을 등산을 갔다 갈비뼈가 부러져 몇 달간 병원 신세를 졌을 만큼 많이 아프셨다는 데도, 3일 내내 오셔서 한참을 계셨고 발인하는 날도 자리를 지키셨다. 마치 한 가족처럼.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또 다른 친구 교수님은 늦은 밤 오셔서 아버님의 영정 앞에서만 홀로 1시간 넘게 지켜보다 가셨다. 우리는 모르는 그분들만의 진한 우정과 추모 방식이겠지만, 유족의 입장에서 아버님 곁에 이런 분들이 계신다는 게 눈물 나게 고마웠다. 과연, 내가 죽으면, 나를 위해 3일 내내 와줄 친구가 있을까. 그때까지 내 친구들은 모두 건강할 수 있을까.




4. 장례 3일을 같이 먹고 잔 친척들


강변 풍경이 좋은 장례식장은 유족들을 위한 공간도 넉넉했다. 펜션처럼 방이 네 개, 침대가 8개나 있어서 유족들이 편히 쉴 공간이 넉넉한 덕분에 아버님 형제와 친지들은 집에 가지 않고 3일 내내 같이 계셔 주셨다.

“가족이 뭐냐. 그냥 같이 있어 주는 거지. 우린 신경 쓰지 마. 밥때만 챙겨주면 돼!”라는 멋진 말을 남기시고 어떤 훈수도 두지 않고 친척들이 오면 조문받고, 나머지 시간은 형제들끼리 담소를 나누시며 있어 주셨다.


그건 5남매의 장남이자 종손으로 얼마나 많은 집안 대소사를 치르며 감당하셨기에 가능한 일일까. 오랜 희생 덕분이 아니었을까. 돈 달라고 오는 친척들 챙기고, 선산을 돌보며, 힘든 일을 혼자서 끝까지 책임지고 하셨던 아버님의 희생 덕분에, 장례 기간 친척들끼리 어떤 소음도 내지 않고 분위기 좋게 장례를 치를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 아버님의 자리가 매우 커다랗게 느껴졌다.


다만,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님은 모시지 못했다. 장례 첫날과 장례를 치른 후, 찾아갔을 때 딱 한 마디 하셨다. “남편이 죽었어도 못 가는구나. 그래도 덜 아프고 가셔서 다행이야!”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교회장으로 하라는 당부만 하셨지만, 속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몇 번이고 이 상황을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으로 마음이 아프지만 어머님은 통 큰 여자셨다.




5. 입관식과 발인 예배


어머니가 원하시던 딱 한 가지였던 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르면서 목사님은 세 번이나 방문해 주셨다. 첫날, 입관식, 발인 예배까지. 아버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던 입관식. 너무나 평화롭고 살아있는 듯한 표정. 차가운 뺨을 쓰다듬어 드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워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살아있을 때의 얼굴 그대로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생과 사는 그렇게 나뉘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눈물 흘리며 작별인사를 하는 친지들.


“아주버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를 울린 건 아버님을 감싸 안으며 전한, 둘째 작은 어머님의 작별인사였다.  일찍 미망인이 되신 둘째 작은 어머님은 아버님이 가장 의지했던 아래 남동생의 부인. 작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자녀들의 애경사에 혼주 노릇을 하시고, 여행도 같이 다니셨고, 작은아버지 기일마다  20년 동안 한 번도 잊지 않고 용돈을 보내셨다고 한다. 그런 분은 없다고. 그 마음 덕에 평생 든든하고, 감사했다고. 처음 알게 된 일이었다.


발인 예배를 드리며 마지막으로 유족의 인사가 있었다. 남편이 일어나 옆에서 보아온 아버지의 약력을 이야기한다. 출생지부터 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일 때 사택에서 운동부 형들과 같이 놀았던 이야기, 대학으로 옮겨 전국체전에서 성적을 내고 선수를 키우고 취업시키려 애쓰셨던 이야기. 남편은 울컥해 멈추기는 했지만 머뭇거림 없이 아버지의 살아온 과정을 이야기하는데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났다.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정신없다가 종교예식을 치르면서야, 온전히 고인을 추모하며 이 시간을 통해서 가족들도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6. 모두를 빚쟁이로 남기고


장례 후 많은 생각이 든다.  시아버지라는 관계를 떠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남긴 흔적을 생각한다. 아버님은 말씀이 없고 조용한 분이셨다. 평생 운동을 해오신 분이라는 선입견과는 사뭇 달랐다. 이젠 할아버지가 된 운동부 제자들이 손주를 데리고 오고, 퇴직 후에도 학교 경비아저씨가 찾아오실 만큼 정이 많은 분. 가족 내에서는 책임질 일이 많은 삶을 사셨다. 돈 달라고 오는 형제들,  평생 할머니를 모시고 사셨고, 월급쟁이로 돈 많이 드는 음악 공부를 시키느라 허리띠를 졸라맸고, 퇴직 후에는 갑작스러운 어머님의 뇌졸중으로 18년을 옆에서 부인 병간호를 하셨다. 그때부터 좋아하던 운동도, 외출도 줄이고 모든 걸 어머님을 중심으로 사셔야 했다.


마지막을 위해 준비를 하신 아버님은 종손의 힘겨운 책임을 자식들에게 안 남기려고 선산의 묘를 정리하셨고, 적금을 찾아다 삼 남매에게 기쁘게 용돈을 나눠 주셨다. 어머님이 요양병원으로 가신 후, 혼자 계시면서 더 힘들어지셨을 아버님. 가끔씩 주변 드라이브를 할 때면, 우리 아이에게 “네 아빠가 할아버지를 아기처럼 잘 대해줘. 참 고마워”라며 말씀하셨다. 혼자서 노년을 보내며 외롭고, 아프고, 자식들한테도 서운한 일들이 많으셨을 텐데, 불편한 것보다 고마운 것들을 먼저 얘기하고 입버릇처럼 “재미있게 살아” 라며 배웅하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늘 남을 먼저 생각하고 양보하며 손해 보듯 사신 87년의 삶이 마침표를 찍었다. 챙겨야 할 대소사와 친척들, 병간호할 부인, 지들 먹고 사느라 바빠 무심한 자녀들까지. 우리 모두는 평생 아버지에게 뭐 달라 뭐 달라하며 채권자처럼 굴었는데,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 모두를 빚쟁이로 만드신 것 같다. 우리는 모두 빚쟁이다. 마지막이 아름다웠던 분. 그건 죽을 때까지 홀로 책임지고 움켜쥔 희생 덕분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어느 누구도 불편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서운하지 않고, 좋았던 마음만 간직하도록 한 그분의 죽음. 마지막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참 쉽지 않은 인생이고, 참 짓기 힘든 마무리다.




7. 첫날과 끝 날은 같았다


“27년간 곱게 키운 딸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결혼하던 날, 아버님의 축사가 생각난다.  고개 숙이며 전한 진심 어린 감사 인사에 눈물까지 흘리셔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셨다. 첫날의 만남과 끝 날의 만남이 다르지 않았다. 똑같이 다정하셨고, 배려심이 많으셨고, 말씀은 별로 없으셨지만 많은 사랑을 퍼주셨다. 죽음에 이르는 육체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드셨지만, 마지막이 아름다운 분이었다.  


살아서는 채권자처럼 굴며, 아버지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요구했던 우리들. 하지만 이젠 우리를 빚쟁이로 만들어 놓으셨다. 빚쟁이가 된 우리들. 받았던 많은 것들을 잘 갚으며 살아가야 할 날들을 생각한다. 황인숙 시인의 말처럼, 남겨진 외상값을 잘 갚으면서.




- 황인숙 -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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