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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살 100단의 세계관 앞에서

<마음사전>, 김소연 작가의 그 문장

엄살 하지 않는 자의 귀는 타인의 엄살 앞에서 언제나 오작동 번역 기계가 된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며 무의식 중에 내뱉곤 하는 ‘으차!’ 하는 기합과도 같은 그 엄살을,
오랜 숙고 끝에 내미는 구조의 요청으로 해석해버리는 습성이 있는 것이다.

엄살 하지 못하는 자는 평생을, 그렇게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그 틈을 타서 운다.

<마음사전>, 김소연

 



1. 심호흡이 필요한 순간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훕”하고 숨을 들이쉬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내게도 딱 그런 후배가 있다. 일을 몇 개씩 겹치기로 하면서도 결국은 다 해내고, 어쩌다 틈만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사방팔방으로 가족여행을 가면서 무지 바쁘게 살지만 웬만해서는 지치지 않는 백만 둘의 에너자이저다. 그런데 열혈 에너지의 후배는 이상하게 일에 들어가기 전, 못하겠다는 말을 자주 하며 엄살을 떤다.


“너무 어려워서 어떻게 하죠? 너무 걱정이 되는데, 언니가 대신하실래요? 근데 이거 하면 ~ 해서 힘들대요. 음~  이런 점이 좀 이상하대요.”  결국 자기가 하고 싶고 자기가 할 거면서, 이렇게 늘 어려울 거 같다며 나한테 대신하겠냐며 '빈말'로 물어본다. 분위기에 휩쓸린 나는, 어느 사이엔가 대신 걱정을 해주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녀가 이 일을 해야 될 이유나 대안을 줄기차게 찾아주며. “괜찮아. 일단 하면 다 해!  일이 다 그렇지, 뭐 ”




2. 그녀가 가진 엄살의 세계관


다음 날이면 내 걱정과 상관없이 그 친구는 어제 말한 걱정 따위는 다 날려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잘 알아서 하고 있다. 굳이 충고할 필요도 없었는데 어젯밤 나는 뭘 한 거지. 가끔 허탈해질 때도 있었지만 몇 번 비슷한 상황을 겪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건 그녀가 가진 ‘엄살’의 세계관이라는 것. 뭐! 마블의 어벤저스만 세계관이 있으란 법이 있나? 문제는 엄살 100단의 사람들이 늘 하는 “으랏차차“ 같은 기합소리를, '도움의 소리'로 잘못 알아듣고 해결책이나 대안을 찾아주려고 다는 것이다.


엄살의 세계관! 이것을 몰랐을 때는 같은 패턴을 반복하면서 이게 뭐지 헤매고, 이 친구를 만나는 일까지 참 불편했더랬다. 그럴 때마다 배에 힘을 주고 "훕"하고 숨을 들이마시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이제는 안다. 이것은 그녀의 '엄살 100단'의 세계임을. 난 그냥 들어주면 될 뿐, 굳이 충고나 조언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녀는 어차피 알아서 똑 부러지게 자기 할 일을 멋들어지게 다 잘 해낼 테니까.




3. 엄살 하지 못하는 자여~


모든 건 '엄살 백 단의 세계관'을 모르는 나의 무지무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이 무지를 알려준 건 김소연 작가의 <마음사전>이다. 책 속에 '엄살'이란 섹션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엄살 하지 못하는 나 같이 바보 짓하는 사람이 여럿이구나 라는 묘한 동지애를 느낀다.  


엄살 하지 않는 자의 귀는
타인의 엄살 앞에서 언제나 오작동 번역 기계가 된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며
무의식 중에 내뱉곤 하는 ‘으차!’ 하는 기합과도 같은 그 엄살을,
오랜 숙고 끝에 내미는 구조의 요청으로 해석해버리는 습성이 있는 것이다.

반 백 살이 돼서야 엄살의 세계관을 영접한 나. 그동안 나의 헛짓거리에도 이유와 이론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책 속의 문장대로, '엄살의 세계를 모르면 모든 타인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오작동 번역기가 발휘된다'는 것. ‘엄살 하지 못하는 자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며 그 틈을 타서 운다’는 것. 딱 내 얘기다. 이 문장들은 마치 의사의 MRI 소견처럼, 내 마음을 스캐닝하며 체기 있는 마음을 탁 털어주었다.




4. 다시 태어난다면


그 후, 난 엄살 100단의 그녀가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다. 굳이 그녀의 엄살 백 단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내 마음 1열에서 느긋하게 직관하는 방법을 터득했으니까. 그래도 고백하자면 가끔씩 그녀의 고단수 '엄살'이 너무 부럽다. 웬만해서는 엄살을 부리지 못하고 감정을 켜켜이 쌓아두고, 가볍게 털 일조차 괜히 먼지 뭉텅이처럼 크게 키우며 살아온 것만 같아서. 어쩌면 엄살이란, '으랏차차'  기합 소리를 내며 감정을 묵히지 않고 툭툭 털어내는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 와서 엄살 100단을 배우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게 아쉬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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