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구두가 고집스러워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그 대사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그런 구두는 도대체 어디서 사는 거야. 이런 싸구려 구두는 본드로 굽을 붙여서 아차 하면 부러져. 그러다가 아킬레스 건 나가는 거지. 무게중심이 안 맞아서 조금만 걸어도 발이 아플 거야. 걸으면서도 불안해. 도무지 신발을 믿을 수가 없으니까. 우리가 주는 돈으로 괜찮은 구두를 사. 안 그러면 평생 발을 질질 끌면서 살게 돼      

- 드라마 <작은 아씨들> 중에서           


#1.  

어릴 적 읽던 고전 작은 아씨들을 현대판으로 재해석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이 방영 중이다. 메그, 조, 에이미의 특성을 닮은 자매들이 주인공인데 드라마는 요즘 젊은이들이 제일 관심 있어하는 '돈' 이야기와 돈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흐르는 우리 사회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기획의도에 내세우고 있다. 1,2회에서 카메라는 유독 여자구두를 자주 클로즈업한다. 살인당한 여자들도 하이힐을 신고 있는가 하면  낡은 구두를 신고 있는 주인공의 발을 자주 비춘다. 어느 날  멋지게 차려입은 주인공의 구두굽이 부러지자, 같이 부자 놀이를 하던 선배 언니가 자신이 신고 있던 명품 구두를 빌려주고 자신은 운동화로 바꿔 신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보면, 구두는 발에 신는 물건이 아니라 지위나 신분의 상징처럼 보인다. 13층 왕따와 14층 왕따라고 소개하는 그녀들을 고용한 사람은 이사. 이사의 여자 취향은 ‘싸구려 신발을 신은 여자들'이라고 누군가 귀띔을 한다.  이사는 구두 공의 아들이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여자 발을 보고 사이즈를 잘 맞히고 발 모양만 보고도 어떤 스타일의 구두가 어울릴지를 판단하며 이런 대사를 던진다.   

   

그런 구두는 도대체 어디서 사는 거야. 이런 싸구려 구두는 본드로 굽을 붙여서 아차 하면 부러져. 그러다가 아킬레스 건 나가는 거지. 무게중심이 안 맞아서 조금만 걸어도 발이 아플 거야. 걸으면서도 불안해. 도무지 신발을 믿을 수가 없으니까. 괜찮은 구두를 사. 안 그러면 평생 발을 질질 끌면서 살게 돼.      


처음에는 싸구려 구두와 명품 구두처럼 사람을 구분 짓는 '신분의 상징'으로 구두를 묘사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대사를 들으며 다른 생각이 슬며시 든다. '무게 중심이 안 맞는 구두는 조금만 걸어도 발이 아프고 걸으면서도 불안하고. 도무지 신발을 믿을 수 없다'는 건 어쩌면 ‘신발’은 그 사람에게 ‘믿음’의 기준일지도 모르겠다는 것. 겉으로는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타인의 본모습을  '구두'에서 찾고 있는 건 아닌지. 돈에 흔들리지 않는 성실한 사람을 '싸구려 구두를 신은' 사람들 중에서 발견하고, 무게 중심이 맞고 발이 아프지 않을 거라는 확실한  믿음을 주는 구두처럼  확실하게 돈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거라는  '믿음'을 줄 사람을 '구두'를 보고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겉모습만 봐서는 좀처럼 신뢰할 수 없는 타인을 믿어볼 만하게 만드는 건 오직 '구두'라고 생각하는 그는 가장 익숙하고 잘 알고 있는 '구두'에서 자신만의 사람 보는 '기준'을 찾은 거구나.            




#2.

우리 엄마도 '구두'에 집착하셨다. 어렸을 때 집에 들어오면 먼저 신발 먼지를 털고 닦아 윤을 내서 신발장에 넣고, 퇴근한 아버지의 구두닦는 일을 용돈을 쥐어주며 우리에게 시키셨다. 반짝반짝 구두를 닦고 굽이 닳기도 전에 수선하며 정성을 들이던 엄마는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 볼 때 '신발'을 본다며 우리들에게도 늘 '신발'을 깨끗이 하고 다니라고. 여기에 하나 더!  다른 사람은 뒤통수를 보니까 앞머리뿐 아니라 뒷머리도 잘하고 다니라는 잔소리도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엄마 화장대 위에는 작은 거울이 하나 더 있어서 뒷머리를 봉긋하게 하고 작은 거울을 뒷거울 삼아 꼭 뒷모습을 확인하고 외출을 하곤 하셨다. 그 습관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내가 닮지 못한 부분이다. 내 유전자에는 신발 잘 닦기와 뒷모습 보는 DNA는 없는 듯싶다.

엄마의 잔소리에  들어있는 '구두'와 드라마 속의 '구두'. 분명 같은 구두지만 '신발'을 통해 보고 싶은 것은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드라마 속에서 이사는 '구두'를 타인의 '굳건한 믿음'을 알아보는 기준으로 삼았다면, 우리 엄마에게 '구두'란 단정함과 부지런함의 기준이었던 것 같다.  




#3.

같은 물건도 사람 따라 무엇을 보는지가 다르다는 걸 겪은 경험담이 하나 더 있다. 동료 작가가 같이 일할 서브 작가를 뽑는 면접을 보게 되었다. 같이 일하던 작가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후임으로 서브 작가가 필요했던 그 친구는 이력서를 보낸 작가들 면접을 보다가 한 친구가 마음에 들었단다. 전에 했던 프로그램도 현재 프로그램과 연관성도 있고, 어떤 것을 물어도 적극적이고 똑똑하고 성실함이 묻어나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옆에 있던  내가 거들었다. 좋은 후배 작가가 들어오는 건 '천군 마마'를 얻는 일인데  ‘성실함과 똑똑함’의 기본기를 갖추었다면 괜찮은 거 아니냐고. 그렇긴한데  마음에 걸리는 게  딱 하나 있었단다. 그것은  ‘너무 유행이 지난 구두’였다고.


" 이상하게 그게 마지막까지 걸리는 거야. 유행 지난 낡은 구두에서 그 친구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졌어. 너도 알잖아. 여러 사람과 일해야 하니까 내 고집만 부릴 수 없다는 거. 근데 그 구두에서 ‘고집불통’을 느낀 거야. 그게 걸려서 다른 친구를 뽑았어."            




# 4.

채용하지 않은 이유가 '유행 지난 구두' 때문이라고 했을 때는 친구가 야박하다고 생각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안 들었다면 오해할 법한 이야기. '꼭 유행이나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라고 반박하고 싶었는데 설명을 듣고서  설득이 되었다. 유행 지난 구두는 '고집스러워'를 외치고 있었구나. 내 눈엔 안 보이지만 그 친구가 발견한 그녀만의 기준! 그래, 너무 고집스럽다면 같이 일하기 힘들겠지. 처음 만난 사이에 ' 저...엄청~~~ 고집 세요'라고 말하지는 않을테니까 누군가의 '진짜 마음'을 구두로 엿본 거였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건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기준이 서로 다를 뿐.


드라마에 나오는 무게 중심이 맞는 고급스러운 구두가 '신뢰'의 기준이라면, 우리 엄마에게 구두란 '단정함과 부지런함'을 말하고 친구가 목격한 유행이 지난 구두는 '고집스러움'의 기준이었다. 보이지 않는, 때론  보여주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내면을 나는 무엇으로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까? 


 


# 5.

어느 책에선가 자주 쓰는 단어는 그 사람의 '상처'라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을 자주 쓰는 사람은 솔직하지 못하거나 솔직함에 취약한 거고  “돈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자주 내뱉는 사람은 반대로 돈을 제일 중요시 여긴다는 거. 어느 게 맞고 틀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의 '구두'처럼, 혹은 누군가의 '말버릇'처럼 다른 사람 눈에는 잘 안 보이는 것을 크게 '확대'해 기준으로 삼으려는 것. 이건  서로를 믿기 어려운 세상에서 나만의 방법으로 사람을 믿고 싶은 '가냘픈 마음'이 아닐까 싶다.(끝.)        

작가의 이전글 내 이름의 부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