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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악일 때 나를 만난다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그 대사

“그들의 오랜 논쟁 때문이었다. 둘 다 잘 알고 있는 것들. 타이밍이 나빴다.
인생의 다른 단계에서 서로를 만났고, 각자 다른 걸 원했다.”


-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1. 너무 질문이 많아     

십여 명의 낯선 사람들이 모인 인문학 상담 첫 수업. 뻔~한 자기소개 대신 자기가 쓴 질문카드를 책상에 늘어놓고 다른 사람이 쓴 질문지를 선택해 자기소개를 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고른 질문은 ‘영혼의 음식’과 ‘별명’.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먹는 인생 소울 푸드가 ‘떡볶이’라는 고백과 20년 넘게 가는 단골 떡볶이집이 있고 임신했을 때 가장 먹고 싶은 음식 중 하나였고 이젠 아들과 같이 가는 추억의 음식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한창 캠핑을 다닐 때 지었던 ‘보물찾기’라는 별명은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부를 때면 평소의 나와 조금은 다른 나를 발견하는 느낌이었다는 설명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소개 후에는 질문받는 시간이었다. 대부분 가볍게 질문하는데 유독 한 사람의 계속된 질문은 거슬렸다.  “영혼의 음식이 필요할 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인가요?”, “캠핑장에서 별명을 부르면 어떻게 다른 나를 발견하나요?” 아... 첫 만남인데.... 집요하다.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 묻는다. 진짜 내가 궁금한 걸까? 웃어넘겨도 되는데 못된 성질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이성이 머리를 통과하기도 전에 입으로 왈칵 감정을 쏟아내고 말았다. “반사! 반사! 원하지 않으면 답변 안 해도 되나요? 하. 하. 하.” 농담도 아닌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조금만 더 참을 걸. 이상하게 난 사적으로 알려고 파고드는 사람들이 참 불편하다. 아니, 취약하다. ‘집요함’에 취약한 체질.            




2. 타이밍이 나빴다     

“ 수상 하러 갈 수 있어요? ”     


이달의 PD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PD의 전화. 그날 중요한 촬영이 잡혀있어 참석이 어렵다며 대리 수상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더 이상 같이 일하지 않는데, 내가(?) 왜(?)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지금 일하는 작가에게 부탁하긴 미안하고, 수상작은 나와 함께 한 작품이라 부탁하는 거란다. '진~짜, 가기 싫었다'. 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고 다른 작가 입장을 생각하니 내가 가는 게 낫지 싶어 가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힘들게 일한 작품이 수상작에 선정되었다니 '기쁜 일이지만 기쁘지 않았다'. ‘결과’는 좋았지만 ‘같이’ 못하게 된 기억을 떠올려야 했으니까. 끝나버린 관계를.


이유가 뭐였더라. 한 단어로 말하자면 ‘집요함’이었다. 자신이 직접 하지 않은 일은 잘 믿지 못하고 따져 물었다. 같이 회의하고 의견을 나눠 섭외한 자문교수와 일반인들의 인터뷰 내용들. 충분히 논의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인양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어버버 내가 말을 못 하는 건가, 아니면 신뢰를 못 준 건가'. 이 상황을 반복하는 일이 피곤해 전화기로 녹음한 내용을 들려준 적도 있다. 이럴 거면 혼자 하지 왜 나랑 같이 하려는 걸까. 그런데 집요한 회의를 빼면 굉장히 날 배려하는 행동도 많았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왜 나한테는 최악의 파트너인 것 같지?' 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가 배려할 땐 난 그걸 ‘가짜’라고 생각했고, 그의 열정이 불타오를 땐 기운이 빠진 난 ‘쓸데없는 집요함’이라 생각했다. 지지직 소리를 내며 맞지 않는 주파수처럼 그와 나는 타이밍이 나빴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서로 원하는 것이 달랐던 것이다.       



       

3. 가장 최악일 때 나를 만난다    

그 일을 하는 두 달 동안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작업 조건도 최악이었다. 방송일자가 변경되는 바람에, 두 개의 다큐멘터리를 동시에 준비해야 했기에, 혹시 다른 쪽에 피해를 줄까 봐 침대에 누워 편히 자지 못하고 쪽잠을 자야 했던 시간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남은 방송 날짜에 X 표시를 하며 수인처럼 지냈다. D-DAY 숫자가 줄어드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매일매일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구멍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힘든 건 '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그의 전화에 대처하기 위해 벨 소리를 다르게 설정해두었다. 침착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어 설정한 벨소리인데, 이상하게 그 벨소리만 울리면 심장부터 ‘쿵쾅쿵쾅’. 오늘은 또 뭐가 문제일까? 별 일 아닌 것도 확대하고 이상하다고 말하면 뭐라고 해야 하지. 여유롭고 우아하게 쓱 넘기고 싶은데 시시콜콜 따지고 들면 심장이 쪼그라들어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프로그램만 좋다고 덥석 달려들어, '최악의 인간'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만난 건 '최악의 그 인간'이 아니라 ‘나’였다. 감정에 별로 동요하지 않는 타입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다른 상황들은 그럭저럭 참을만하고 별 타격감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집요함'만은 그게 안되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기분. ‘난, 집요함에 민감하고 대단히 취약한 체질'이었던 것. 그렇게 최악의 순간, 바닥을 치는 순간, 맞지 않는 인간을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진짜 나'를 만났다. 감춰둔 진짜 나를 발견하고 나서야 미련을 버리고 그와 일하기를 손절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음고생하고 최악의 조건에서 만든 작품이 '수상작'이 되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없다. PD 대신 참석한 그날, 나는 대리 수상에 수상 소감도 말하고 웃으며 찍은 단체 사진 한 장을 인증샷으로 남기게 되었다.  



        

4.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추석 연휴 때 본 영화 한 편이,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제목만 보면 영락없는 로맨스 영화인데 원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다. 원제보다 번역 제목이 더욱 멋들어진 이 영화는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유형의 로맨스 영화', '꼭 하나쯤 있었으면 싶은 로맨스 영화'라는 평을 받는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12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어 책 한 권을 펼치면서 보는 느낌이 나는데, 챕터의 제목들도 꽤 인상적이라 하나씩 제목을 써본다.       

 

ch1. 다른 사람들(The others)

ch2. 바람피기 (Cheating)

ch3.#미투 시대의 오럴섹스 (Oral Sex in the age #MeeToo)

ch4. 우리만의 가족 (Our own family)

ch5. 타이밍이 나빴다 (Bad timing)

ch6. 핀마르크 산악지대 (Finnmark highlands)

ch7. 새로운 장 (New Chapter)

ch8. 율리에의 나르시스적 서커스 (Julie's narcissistic circus)

ch9. 밥캣이 성탄절을 망치다(Bobcat wreks Xmas)

ch10. 일인칭 단수 ( First person singular)

ch11. 양성반응(Positive)

ch12.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Everythings comes to an end)                          


전도유망한 의대생에서 심리학과 학생으로, 시각에 예민하다며 사진으로 전공을 바꿔가는 29살의 주인공 율리에. 현실은 서점에서 알바를 하며 진로를 찾아 헤맨다. 서른 살 생일을 맞을 즈음 만난 남자들과 연애하며 방황하는 스토리인데 나는 달콤한 '사랑 이야기'보다는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읽힌다. 여기서도 남자와 여자의 나이차로 느끼는 세대 차이, 아이를 가질까 말까 하는 고민이나 맨스 플레인과 우먼스 플레인의 갈등은 서양이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율리에는 우연히 파티에서  40대 그래픽 노블 작가 악셀을 만나 사랑을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많은 걸 이룬 그를 보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신을 조연처럼 느낀다. 난 내 삶의 구경꾼인 기분이야. 내 인생인데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라는 말을 남기며 또 다른 상대를 찾아 떠난다. 현재를 즐기며 사는 듯 보이는 매력적인 에이빈드를 찾아간 율리에. 처음엔 그의 생동감 있는 매력에 반하지만 전 남자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며 웃을 수 있는 인간형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또다시 갈등한다."50 돼서도 커피나 나를 거야"라는 독설을 퍼부으면서. 이럴 때마다 율리에는 노을 지는 오슬로 거리를 걸으며 좀 더 자신에게 맞는 길을 고민하고 또 다른 선택을 한다. 비록 안정적이고 완성된 형태가 아닐지라도. 특히 환상적인 장면을 통해 율리에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장면은 독특하면서 사랑스럽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악셀과 헤어질 때. '사랑하는데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으며 그동안 쌓아온 갈등에 화내고 울고 설득하고 싸우면서도 섹스하는 장면까지 촘촘하게 보여주며 최악의 자신을 드러낸다. 헤어질 때 벌어지는 상황을 길지만 설득력 있게. 남자의 입장에서 또 여자의 입장에서. 이때 나오는 내레이션.

그들의 오랜 논쟁 때문이었다. 둘 다 잘 알고 있는 것들. 타이밍이 나빴다. 인생의 다른 단계에서 서로를 만났고, 각자 다른 걸 원했다.

누구의 잘못이나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것. 인생의 다른 단계에서  만났고 각자 다른 걸 원했다고 설명한다. '타이밍이 나빴다'라고. 20대 청춘은 40대의 안정과 성공이 부럽지만, 초라한 자신의 현실과 비교하면 조연처럼 보이고, 40대 꼰대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급하고 빨리 안정을 찾고 싶어 한다. 인생의 다른 단계에서 만났기 때문에 다른 걸 원하고 서로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사랑하지만 최악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나중엔 이 순간을 엄청 그리워하게 될 지라도. 지금은 그렇고 그래야만 하는 시간이라고.


 


5. 인생의 스승일지라도...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보면서 내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며 <가장 최악일 땐 내가 보인다>로 비틀어 생각하게 된다. 나와 맞지 않은 '타인', 정말 피하고 싶은 '타인'을 만날 때, 나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최악의 순간에 가서야 진짜 ‘나’를 만난다는 사실. 홀로 있을 땐 알지 못했던 '진짜 내 모습'. 내가 힘들어하는 집요함, 나를 통제하려는 사람들, 나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 그 사이에 있을 때 맥없이 흐느적거리는 진짜 내 모습. 가끔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최악의 타이밍에서 최악의 순간을 만들었던 그들은 어쩌면 내 인생의 스승 일지도 모른다. 고맙기도 하지만 고맙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난 최악의 인간들에게서 도망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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