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초년생의 회고
막 학기 인턴 5개월, 해외 인턴 곧 6개월 차.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정신없이 적응기를 거쳤다. 일을 해본 지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우리 학교가 무척 그리워졌다. 사실 인간관계나 학업적인 요소보다 일상에서 맞이하는 소소함이 더 기억에 남는다. 불과 1-2년 전 일인데 힘들었던 기억은 모두 아득하고 뭉클하게 미화돼버렸다. 특히 이맘때.
2호선과 7호선이 맞닿는 건대입구역, 사람에 떠밀려 답답한 히터가 나오는 애매한 위치에 겨우 타면 얼빠진 얼굴로 30분을 서서 간다. 내릴 때쯤에야 자리가 겨우 나면 1교시 동지들이 피곤한 기색을 하고 문자락 앞에 서있다. 정신없는 아침을 깨워줄 싸구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위해 8층 강의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린다. 지하의 작은 베이커리 긴 줄 끝에서 만난 동기와의 짧은 대화, 아쉬움을 뒤로하고 항상 앉는 내 자리로 돌아온다. 학교 식당 밥을 참 좋아한다. 딱 대학생다운 한 끼니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친구와의 점심 약속에 학교 정문 앞 식당과 카페에서 작은 사치를 부려본다. 어느 정도 학점 욕심이 있는 일부의 팀원들과 조별 프로젝트를 늦은 밤에 마친다. 시간 대비 소득 없는 듯한 허탈감, 잡 상념과 함께 상도역으로 가는 마을버스 01번에 몸을 싣는다. 팀 프로젝트 일정이 없는 날에는 도서관에서 보내다 종종 몰려오는 피곤함에 엎드려 쪽잠을 자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도서관 얘기를 하니, 문득 2학년 중간고사 때 나의 흑역사가 생각난다. 그날은 흑석역까지 가는 내내 그 좁은 인도에 있던 사람들마저 나를 두고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었다. 시험기간 중앙도서관은 모든 학교가 그렇듯 만석에, 24시간 불이 켜져 있다. 그 날은 시험이 10시라 나도 전 날부터 집에 가지 않고 밤을 새웠다.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나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했고 내 자리 시간을 연장하는 걸 깜박하고 말았다. 다음 사람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을 때 그제야 시험시간이 이미 지났음을 깨달았다. 둥 둥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사색이 된 얼굴로 강의실까지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이미 시험을 친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고 있었고 앞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한 동안 멍하니 그 문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앞 쪽문이 살짝 열리더니 교수님이 나오셨다. 눈물이 차올랐다.
"교수님!"
"어? 너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도서관에서 급히 나오느라 손에 잔뜩 든 책과 가방, 찌든 내 얼굴. 자초지종을 설명할 새도 없이 교수님은 나를 끌고 들어가셨다. 맨 앞줄에 앉히시곤 바들바들 떠는 나에게 "내가 중간에 화장실 안 갔으면 어쩔뻔했니. 일단 최선을 다해봐라." 나지막이 말씀하시고는 조교를 내보내셨다. 적막한 강의실, 교수님과 나. 남은 15분 동안 논술형으로 답을 작성해야 했는데 무슨 생각으로 답을 휘갈겼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 눈물인지 땀인지 젖은 답안지를 제출하고 교수님께 감사함을 표현했다.
"너 맨날 앞쪽에 앉는 애지?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많아. 평소 열심히 하고 준비를 완벽히 했다 해도 살다 보면 참 생각지도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이런 것 갖고 너무 낙심할 필요 없어. 얼마나 재밌어. 학생 때 이런 추억 하나쯤은 있어야지! 아직 중간고사잖아, 30퍼센트밖에 안 되는 걸 갖고 그렇게 세상 다 잃은 표정 지으면 어떻게 살래 학생. 고생했어, 시험 보느라."
따뜻한 위로의 말씀에 교수님 앞에서 애기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집에 오면서까지 엉엉 울었던 22살의 그 날. 시험을 못 봐서 서러웠던 날이기보다 교수님의 말씀 한마디가 아직까지도 생생한 걸 보면 많은 깨달음과 위로를 얻었던 날이지 않을까. 그 뒤로 거의 나는 교수님의 팬이 되어 두 번째 줄만 고수하던 자리를 첫 번째 줄로 옮겼고 전공과목도 아닌데 수업준비도 철저히 했다. 그 수업이 있는 날에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남들보다 3배는 공들였다고 자신할 만한 과제와 기말고사로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아 참, 기말고사 때에는 그 전날 마음 편히 푹잤다.
첫눈이 내리는 이맘때쯤 기말고사 기간인데, 항상 신기하게도 4년 내내 시험 끝나는 날이 내 생일이었다. 종강과 함께 즐기는 생일, 연말 분위기 물씬 즐기며 친구들과 왁자지껄 보내던 생일. 그 때가 너무 좋았다. 요령도 모르고 순수하게 열심이었던, 매번 진로에 대해 방황하고 고민 많던 학부생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사회초년생의 나도 별반 다를 게 없지만 학교라는 울타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