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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ttomato Mar 02. 2021

후기 | 미국에서 영화 ‘미나리’를 보고

03.01.21


* 본문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원치 않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준비하던 시험을 무사히 잘 치르고 갑자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만끽하던 중 일 년 넘도록 가지 못했던 영화관이 무척이나 가고 싶어졌다. 요즘 상을 휩쓸고 있다는 ‘미나리’를 텅텅 빈 극장 덕분에 남편과 오붓하게 보고 왔다.


이 영화는 잔잔하지만 간결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리고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하다.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국 아칸소 시골마을에 온 70년대의 어느 한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다. 감독의 자전적 요소와 함께 마치 이주 노동자의 하루 일상을 관찰하듯 쉽게 빠져들 수 있었고 자칫 뻔할 수 있는 소재를 뻔하지 않게 나타내었다. 또한 우리가 공감할만한 한 가정의 이야기를 아이의 시선으로 영화를 전개시키는 점은 보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실제로 이민자가 먼 타지에서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부분은 바로 언어의 장벽인데 이민 초기 시절 육체 노동직을 선택했던 많은 이민자들의 노고를 영화를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제이콥(스티븐 연)의 머리를 모니카(한예리)가 감겨주는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찡하다. 농사일로 무리한 제이콥의 얼굴을 타고 내려오는 굵은 물줄기는 ‘새롭게 미국에서 시작해보자’하고 외쳤던 당시의 희망과 설렘마저 함께 흘려내려 버리는 듯해 안타까웠다.


스티븐 연, 윤여정, 한예리 셋 다 워낙 내가 좋아하는 연기파 배우들이라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아이들의 연기력 또한 대단했다. 감독이 직접 겪었을 법한, 어린 나이에 겪는 이민 2세대의 고민과 갈등을 영어와 한국어를 통해 잘 표현해내었다. 오히려 이민 1세대라고 하기에는 어눌한 제이콥(스티븐 연)의 한국말과 중간중간 들리는 완벽한 영어 발음에 약간 의아했지만 곧 그의 감정연기에 잊어버리게 되었다.

나도 미국에서 막 정착해나가고 있는 입장으로서 영화 곳곳에서 공감대를 찾을 수 있었고 그동안 고생했을 선대 이민자 분들에게 감사함까지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다.


미나리를 보던 중 나는 순자(윤여정)의 처음과 마지막 순간에서 눈물이 났다.


첫 포인트는, 한국에서 멸치며 고춧가루며 한약까지 미국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것들을 바리바리 갖고 와 오랜만에 딸을 재회하는 장면이었다. 별로 슬픈 장면도 아니었는데 괜스레 엄마 생각이 났나, 그리고 불과 며칠 전 시어머님이 통화로 고춧가루를 못 보내신 걸 아쉬워하셨던 게 오버랩이 되었다. 멀리 사는 자식을 위해 고향의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채워주려는 엄마들의 사랑은 다 똑같나 보다.


마지막에는, 죄책감과 허탈함으로 가득 채운 발걸음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순자를 아이들이 붙잡는 장면에서 남편 몰래 눈물을 훔쳤다.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자 자처한 일이 결과적으로는 시뻘건 불길을 만들며 순식간에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렸다. 순자까지 어떻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아이들이 붙잡아줘서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매사 부딪혔던 코리안 할머니를 이젠 가지 말라고 매달리다니. 세상 모든 우리네 할머니들께 이 영화를 바친다는 엔딩 크레딧마저도 따뜻했다.


영화의 결말은 어떤 의미일까.


영화에서 제이콥과 모니카가 다투는 모습이 나온다. 아칸소에서 한국의 농작물을 심어 판매한다는 목적을 끝까지 이루려는 제이콥, 그런 그를 따라 힘든 시골 생활을 더 이상 견뎌내기 벅찼던 모니카는 결국 캘리포니아로 떠날 계획을 밝힌다. 그리고 시골 환경과 잘 맞아 심장병이 호전된 아들과 제이콥 둘 만이 할머니가 심어둔 미나리를 캐면서 이 영화는 끝이 난다.

다른 채소보다 질긴 생명력과 뛰어난 적응력을 가진 한국의 미나리.

순자가 실수로 냈던 불은 이 가정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든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예상해 보건대 모니카는 월등해진 실력으로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제이콥은 미나리로 다시 재기하는 계기가 되어 사업을 확장시킨 뒤 모니카를 찾아가 “내가 해낼 거라 했지? 이제 그만 고생하자.”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혼자만의 상상을 펼쳐보았다.


미나리는 골든글러브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미나리는 골든글러브 수상 부문에서 외국어 영화로 분류된 점에 있어 많은 논란이 있었다. 대사 50% 이상이 영어인 영화만 작품상에 오를 수 있다는 시상식 규정에 따라, 영어 비중이 낮다는 이유로 미나리는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출품할 수밖에 없었다. 출연진 대부분이 미국인이고 미국이 배경인 이 영화를 외국 영화와 함께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맞는지 의문이다. 외국어영화상을 거며 쥐었지만 조금 아쉬움이 남는 한 편, 작년에 이어 올 해의 아카데미도 떠들썩할지 기대가 된다.


유구한 이민 역사를 지닌 미국의 이야기는 결국 다른 나라, 외국의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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