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시작한 일본어가 밥을 먹여 줬습니다.
일본에서 취업하고 싶어 혼자서 두 시즌 동안 고군분투했더니, 6개 회사로부터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그 속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의 에피소드를 담았습니다.
2018년 9월 3일 월요일, 6개월 간의 일본 유학이 끝났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근처 지하철 역 사물함에 보관해 두고 등교를 했다. 개강일에 맞추어 귀국 비행기 티켓을 샀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최대한 늦게 돌아오고 싶다는 소리 없는 발버둥이었다. 한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꿈을 꾸고 돌아온 듯 이질감마저 느껴진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공기가 사뭇 다르다. 대학 마지막 학기 개강일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반가움보다는 긴장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방학 때 드디어 토익 점수를 만들었어.” “나는 공채 지원 중인데 잘 안되더라.” “너는 방학 때 뭐했어?” 벌써 취업에 성공하여 취업계를 쓰기 위해 교수님과 면담 중인 동기들도 보인다.
나는 이제 막 취업에 뛰어들었다. 심지어 해외 취업이다. 동기들은 벌써 한 발자국 씩 멀어져 가고 있다. 마음이 급해진다. 빨리 성과를 내야 한다.
집으로 돌아와서 무작정 컴퓨터를 켜고 ‘일본 취업’이라고 검색해 본다. KOTRA에서 주관하는 일본 취업 박람회가 열린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일문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하여 서류 합격을 하면, 박람회장에서 1차 면접 기회가 주어진다.
여기에 참여해야겠다. 꼭 합격 통지서를 받아내야겠다. 한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전공 수업 6개와 졸업 논문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일본에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었다.
취업 박람회에 참여하는 기업은 100여 곳. 그중에서도 지망 업계를 관광 및 호텔 업계로 좁히기로 했다.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서 관광학 전공, 호텔 업계 인턴 경험, 외국어를 어필해야 했기 때문이다.
참여 기업 리스트의 스크롤을 내리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교토역과 바로 연결된 어느 특급 호텔의 프런트 직무였다. 유학할 때 셀 수도 없이 지나다녔던 그곳이다. 교토에서 유학을 했던 경험 덕분인지 무난하게 서류 합격을 하여 1차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면접 전 날, 자기소개와 지원 동기를 작은 수첩에 적어 두고 달달 외웠다. 한 단어라도 잊어버리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긴장도 배가 되었다.
며칠 전 렌털 샵에서 빌려 온 새까만 정장을 입고 거울 앞에 선다. “잘할 수 있어. 긴장하지 마.” 속마음과 다르게 식은땀이 흐른다. 일본 취업에서는 면접 정장의 형식까지 정해져 있다. 검은색 정장, 하얀 블라우스, 3cm 굽의 검은 구두. 몇 번이나 옷을 입어 보고 가장 잘 맞는 옷을 빌려 온 것인데. 재킷 밖으로 삐져나온 하얀 블라우스 소매가 유난히 신경이 쓰인다.
박람회장으로 향하는 순간까지 수첩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앞에 앉은 면접관은 이 긴장이 무색할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 여성이었다. 첫 질문은 당연히 자기소개일 것이다. 자다가도 툭 치면 나올 정도로 외워갔는데, 오히려 여기까지 오는데 멀지 않았냐며 안부를 묻는다. 따스한 첫마디에 몸이 사르르 녹는다.
앞에 놓인 내 이력서를 힐끗 보니, 형광펜으로 군데군데 노란 줄이 쳐져 있었다. 그녀 역시 교토에 살고 있다며 이웃이라고 미소를 지어 준다. 교토의 어떤 점이 가장 좋았냐는 물음에 '사람들'이라고 대답했다. 전날 밤까지 달달 외운 자기소개보다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왠지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좋은 예감이 든다.
최종 면접은 교토 현지에서 열렸다. 임원 면접, 필기시험, 호텔 투어까지 이루어지는 다소 긴 일정이다. 학기 중에는 일본까지 다녀올 수 없어서 날짜를 조율하다 보니 크리스마스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내 편의를 위해 호텔 업계에서 가장 바쁜 시즌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면접 일정을 맞추어 준 것이다.
매일 지나다니던 교토역에 면접 정장을 입고 서 있다니. 감회가 새롭다. 호텔 로비 북측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 담당자를 만났다. 1차 면접 때의 면접관도 함께 인사를 하러 나와 주었다.
객실 수만 500여 개, 연회장, 웨딩홀, 3개의 레스토랑까지. 엄청난 규모에 투어에만 두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나를 안내해 준 담당자는 내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오늘 자신의 임무라며 덧붙인다. “면접 전에 걱정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얘기해 주세요.”
크리스마스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투어를 위해 타입 별로 한 개씩 객실을 빼 주었다. 객실 구석구석 외국인들이 일본의 전통을 느낄 수 있도록 고민한 흔적이 돋보인다.
최종 면접이 끝났다. 그의 배려 덕분에 호텔을 구경하며 느낀 점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저는 교토에서 유학하며 일본 사람들의 정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저는 이 것을 가장 일본스러운 도시인 교토, 그 관문인 교토역에 있는 귀사에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호텔을 나오는 나의 발걸음도 가볍다. 외국인 지원자 한 명의 면접을 위해 시간을 내 준 직원들만 무려 열 명이다. 또 하나의 감사하고 즐거운 추억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에는 가장 좋아하는 선술집, ‘캬사’에 갔다. 문을 여니 한결같은 인사말이 들려온다. “닷쨩, 어서 와. 오랜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