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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교수님의 생명 도토리
by 생명다양성재단 Jan 21. 2016

생태학자의 길

최재천 교수님의  '하늘다람쥐가 물어오는 생명도토리' #12


 세계 유명한 도시들에는 종종 ‘철학자의 길’이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원조로 일본 교토, 캐나다 토론토,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대표적인 곳들이다. 그 옛날 철학자와 시인들이 걷던 길을 잘 보존해 일반인에게 공개한 하이델베르크의 Philosophenweg가 관광 명소로 떠오르면서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개념의 길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교토 철학자의 길은 교토대 철학 교수였던 니시다 기타로(Nishida Kitaro)가 매일 명상하며 걸었다는 수로 옆 벚꽃길을 따라 만들어져 있다. 걷는 데 30분 정도 걸린다. 캐나다 토론토대 캠퍼스에도 철학자의 길이 조성됐고, 2007년에는 세 명의 환경예술가들이 샌프란시스코 존 매클라렌 공원(John McLaren Park)에 거의 5km 길이 둘레길 형태의 철학자의 길을 만들었다. 철학자의 길들은 모두 한결같이 시설물이 거의 없는 미니멀리스트 스타일(minimalist style)로 만들어져 있다. 걸으며 너무 분주하게 보고 읽는 게 아니라 천천히 걸으며 깊이 생각하라는 의미인 듯싶다.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
캐나다 토론토대 캠퍼스 철학자의 길
샌프란시스코 존 매클라렌 공원 철학자의 길
교토 철학자의 길


 ‘국립생태원에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나는 이런 철학자의 길을 벤치마킹한 ‘생태학자의 길’을 구상했다. 그 첫 작품으로 2014년 11월 23일에는 세계적인 환경운동가이자 침팬지 연구가인 제인 구달 선생님을 모시고 ‘제인 구달의 길(Jane Goodall’s Way)’ 명명식을 올렸다. 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생태원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은 치과에서 치아 본을 뜰 때 사용하는 끈적끈적한 분홍색 액체의 냉기에 발을 담그셔야 했다. 지금 제인 구달의 길 입구에는 우리 시대에 살아 있는 전설로서 생명 사랑의 위대한 족적을 남기고 계신 선생님의 작은 두 발이 방문객들과 함께 걸을 차비를 하고 있다. 숲으로 난 약 1km의 길을 따라 걷노라면 선생님이 처음 아프리카에 가셨을 때 묵었던 것과 매우 흡사한 텐트를 비롯해 침팬지 둥지, 침팬지가 나뭇가지를 집어넣어 그걸 공격하는 일개미들을 낚시해 먹은 흰개미굴 모형 등이 재현되어 있다. 

국립 생태원 '제인구달의 길'을 방문한 제인구달 박사 


 제인 구달의 길에 이어 2015년 11월 24일에는 ‘찰스 다윈의 길(Charles Darwin’s Way)’을 조성해 명명식을 가졌다. 구달길과 달리 다윈길을 준비하는 과정에는 한 가지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다. 다윈 선생님을 모셔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모시는 일은 현대 과학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다윈과 무척이나 닮은,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다윈의 이론을 가장 확실하게 검증하는 연구 업적을 남기고 있는 생태학자를 떠올렸다. 바로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다녀간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다윈이 사실 정체도 명확하게 모르면서 채집해서 영국으로 보낸 핀치새(Darwin’s finch)를 무려 40년 넘게 연구하고 있는 피터 그랜트(Peter R. Grant)와 로즈매리 그랜트(Barbara Rosemary Grant) 부부 교수를 모시기로 했다. 두 분 다 영국 태생으로 피터 그랜트 교수가 캐나다 British Columbia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하던 시절 만나 결혼한 후 지금까지 공동 연구를 함께 수행하는 생태학계 최고의 잉꼬부부이기도 하다. 11월 27일 이화여대에서 강연을 마친 후 40년 이상이나 부부로 사이좋게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냐 묻는 어느 학생의 질문에 피터 그랜트 교수는 “우리는 늘 토론을 했을 뿐 절대로 언쟁을 하지 않았다”고 답해 학생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갈라파고스 섬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는 그렌트 부부 / 사진 ⓒK. Thalia Grant.


 그랜트 교수 부부는 내가 여러 면에서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들이다. 내가 지금 집필하고 있는 책 ‘다윈의 사도들(Darwin’s Apostles)’에서 나는 이 두 분을 소개하며 “다윈이 만일 살아 돌아온다면 제일 먼저 만나고 싶어 할 학자들”이라고 적었다. 다윈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은 지극히 논리적이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메커니즘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대개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 살아 있는 생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랜트 교수 부부는 갈라파고스 제도의 작은 섬 대프니 메이저(Daphne Major)를 거점으로 기후 변화로 인한 생태 환경의 변화가 핀치새의 형태와 행동의 진화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현장에서 생생하게 보여줬다. 나는 감히 유전자의 관점에서 다윈의 이론을 재해석한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과 더불어 이 두 분을 다윈 이래 가장 탁월한 진화생물학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찍이 나는 2002년 우리나라가 세계생태학대회(INTECOL)를 유치했을 때에도 주저 없이 이 분들을 기조강연자(keynote speakers)로 모신 바 있다. 이번에 그로부터 13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이다. 

 국립생태원 '찰스다윈의 길'을 걷고있는 그랜트 부부 / 사진 ⓒ국립생태원


 나는 이 분들을 가장 존경하는 동시에 “좋아한다”고 말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종종 안하무인이거나 괴팍한 편이다. 이 분들은 다르다. 나는 이 두 분보다 더 다정하고 자상한 학자를 알지 못한다.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다음 직장을 얻기 위해 여러 대학 교수직에 지원서를 내던 시절 프린스턴대에도 자리가 나 원서를 보냈다. 기대와는 달리 낙방을 알리는 얇은 편지가 도착했다. 그런 편지를 벌써 몇 차례 받은 바 있어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열어본 그 편지 끝에는 연필로 적은 몇 줄의 메모가 있었다.  그때 학과장을 맡고 있던 피터 그랜트 교수가 쓴 것인데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위원회가 돌연 원래대로 진화생물학자를 뽑는 게 아니라 분자유전학 전공자를 뽑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지만 않았어도 당신은 매우 유력한 후보자였을 겁니다.” 자칫 법적으로 민감할 수도 있건만, 그리고 지원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2009년 한국일보 기자와 함께 프린스턴으로 두 분을 인터뷰하러 간 적이 있었다. 뉴욕에서 출발해서 가는 길에 갑자기 억수 같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우리는 예상보다 거의 두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가까스로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나는 저 멀리 우산을 들고 서 계시는 두 분을 발견했다. 우리가 주차장에서 건물까지 이동하는 동안 비를 맞을까 걱정돼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것이었다. 그 세계적인 대학자들이. 

찰스 다윈 기념비석에서  그랜트 부부 / 사진 ⓒ국립생태원


 피터 그랜트 교수는 마침 다윈의 고향에서 한 시간도 채 안 떨어진 곳에서 태어나셨고 외모가 다윈을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서 나는 다윈 길 명명식에 오셔서 다윈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대신 다윈 길 중간쯤에 자연스레 길이 둘로 갈리는데  그중 한쪽 길을 ‘그랜트 길(Grants’ Way)’로 명명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두 분 모두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다윈—그랜트 길의 입구에 우리는 갈라파고스 제도를 구현한 원형 벤치를 만들었다. 가장자리에는 가장 대표적인 핀치새 네 종을 그렸고 국립생태원의 홍보대사이기도 한 소설가 김훈 선생님의 근저 ‘라면을 끓이며’에서 찾은 명문을 새겨 넣었다. “다윈은 아직도 관찰 중이고, 진화론은 지금 진화 중이다.” 그렇다. 현대의 다윈은 40년이 넘도록 여전히 관찰 중이고, 그 덕에 진화론은 지금 진화 중이다. 



글|  최재천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 국립생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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