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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명다양성재단 Jan 31. 2017

국립생태원을 떠나며

하늘다람쥐가 물어오는 생명도토리 #16

임기를 마치고 생태원에서 옮겨온 책들 

 평생 교수로 살면서 제대로 된 보직 한번 맡지 않았던 내가 어쩌다 국립기관 그것도 신설 기관의 장이 되어 3년 하고도 한 달 반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최고경영자(CEO)로 살아봤다. “세월이 살 같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새삼 새롭다. 처음 부임했을 때 간단한 행정 용어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보며 황당해 하던 직원들의 눈초리를 잊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을 택했다. “행정, 제까짓 게 뭔데” 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이름난 경영학 관련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회계학 책도 몇 권 사서 공부했다. 지도자의 자질 문제를 놓고 온 나라가 뒤집힌 마당에 자칫 적절하지 못하게 비춰질까 저어되지만 기획재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지은 공공기관으로 성공한 둘 중의 하나로 국립생태원을 꼽는다니 CEO로서의 내 삶이 그리 나쁘진 않았나 싶어 그 동안 배워 실천한 나만의 경영 원칙을 소개하련다. 



 첫째, 절대로 군림하지 않는다. 

나는 책상에 앉은 채로 업무 보고를 받거나 결재를 하지 않았다. 반드시 소파에 내려와 앉아 같은 눈높이에서 보고도 받고, 질문도 하고, 사인도 했다. 그래서 결코 충분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의견 교환도 가능했고 직원들도 어느 정도 주인 의식을 갖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군림하지 않고 늘 함께 동행(同行)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항상 원장실에 와서 보고나 상의를 하는 일상을 깨기 위해 가끔은 내가 직접 사무실을 찾아가기도 했다. 어차피 기관의 장은 가만히 있어도 권위가 따르는 법이라 오히려 그 권위를 일정 부분 무너뜨리고 싶었다. 이런 노력으로 생태원의 그 누구도 나를 권위적인 리더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국립생태원 시상식에서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무릎을 꿇고 상장을 전달한 최재천 교수

 


 둘째, 내가 제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려 했다.

나는 대학에서도 학생들에게 “공부 안 하냐”, “논문 빨리 안 쓰냐”라며 보채지 않는다. 그냥 내가 그들보다 늘 더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했다. 그랬더니 그들 중 몇몇이 기특하게도 나를 따라오더라. 또 그들 중 몇몇은 나를 앞질러 달려 나가기도 하고. 생태원에서도 직원들을 독려는 했지만 득달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하는 것이 남이 시켜서 하는 것보다 길게 보면 훨씬 더 훌륭한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걸 나는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설령 결과를 제대로 못 내거나 내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로 일을 해치운 직원에게도 단 한 차례도 대놓고 야단을 치거나 벌하지 않았다. 실수를 하거나 일을 뜻대로 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더 잘 안다. 넘어진 사람을 짓밟아봐야 상처만 깊어질 뿐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가능한 따뜻하게 함께 일하려 노력했다. 



 셋째, 절대로 뒤로 숨지 않는다.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일일수록 내가 앞장서려 했다. 제33대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명언 “The buck stops here!”를 늘 가슴에 새기고 일했다. 원장이 직접 나서면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고 극구 만류해서 멈춘 적은 두어 차례 있었지만, 모든 책임은 궁극적으로 내게 있음을 분명히 했고 기재부나 환경부에 달려가는 일이나 국회의원들에게 읍소해야 하는 일, 지역 주민들에게 허리를 굽혀야 하는 일 등을 되도록 직원들에게 떠밀고 나는 뒤로 숨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일이 잘못 되면 원장인 내가 모든 책임을 질 것이니 과감하게 추진하라 독려했다. 궂은일에 기꺼이 나를 팔아먹으라고도 여러 차례 지시했다. 



 넷째, 전체와 부분을 모두 살핀다.

이건 이제 어느덧 알고 지낸 지 15년지기가 된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님이 가르쳐준 덕목이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이라는 서양 격언이 있다. 기관의 장은 흔히 큰 그림이나 그리며 조직을 이끌면 된다고 하는데, 그건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디테일도 꼼꼼히 챙기지 않으면 조직이 와해되는 걸 알 수 없단다. 그러면서 기관장이 적어도 대차대조표 정도는 볼 줄 알아야 한다기에 그 길로 서점에 달려가 회계학 책을 세 권이나 사서 제법 열심히 공부했다. 절대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진 않았지만 모든 업무가 어찌 돌아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거의 매일 밤 문건들을 읽고 때로는 글도 고쳐주곤 했다. 어느덧 우리나라 최고의 경영자로 추앙 받는 서회장님의 이 가르침은 제게 아주 적절하고 유용했다. 



 다섯째, 결정은 신중하게 내리되 결코 오래 끌지 않는다.

지도자의 임무 중 으뜸이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다. 지나친 햄릿형 지도자는 모두를 어렵게 만든다. 물론 생각이 깊지 못한 동키호테형은 일단 지도자로서 자격조차 없지만, 그렇다고 결정을 마냥 미루면 담당자들은 손을 놓고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결정일수록 신속하게 내려주는 게 지도자의 덕목 중 가장 중요하다. 최종 책임이 어차피 내게 있다고 생각하니 결정을 내리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의 잘못 된 결정으로 애꿎게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을까 그게 두렵지 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은 스스로 저지른 일의 대가라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래도 결심을 거의 굳힌 상태에서 언제나 한 차례 더 멈춤의 시간을 가졌다. 역지사지의 방법으로 제 결정이 불러올 파장에 대해 다시 한 번 검토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일이라도 한번쯤 묵혔다 가는 방식은 내가 오래 전부터 해오던 것이다. 그 덕에 다행히 큰 실수 없이 일들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임기를 마친 후 돌아온 통섭원 책상

 나는 감투에 욕심이 있어 국립생태원장이 된 게 아니었다. 내가 꿈꾸고 기획한 국립생태원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오로지 일을 하러 원장 직을 수락했다. 그래서 정말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일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내려놓지 않으면 당연히 어깨가 무거워지고 판단이 흐려지게 마련이다.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지혜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마당에 과분한 얘기겠지만, 맡은 바 소임에 적당한 정도의 사람을 앉히면 허덕허덕 겨우 해낼 뿐이다. 능력이 넘치는 사람이 일을 맡아야 여유롭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취업을 준비하며 허전해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할 얘기인지 모르지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어떻게든 대기업의 좁은 문으로 운 좋게 기어들어갈 생각만 할 게 아니라 내 능력을 필요로 하고 나도 여유 있게 즐기며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는 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닐 것이란 제안을 조심스레 해본다. 



글|  최재천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 국립생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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