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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명다양성재단 May 08. 2017

나의 돌고래 짝사랑

하늘다람쥐가 물어오는 생명도토리 #17


 1992년 나는 미시건대 조교수로 임용되어 그곳 동물학박물관(Museum of Zoology)에 둥지를 틀었다. 하버드대에 있을 때에는 내 연구실이 생물실험동(Biological Laboratories)에 있어서 복도에서 주로 세포학, 유전학, 생리학 등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생물학자들과 자주 마주쳤는데, 미시건 동물학박물관에는 나처럼 산으로 들로 바다로 강으로 쏘다니며 새, 물고기, 곤충, 양서파충류 등을 쫓아다니는 학자들만 오글오글 모여 있어 정말 좋았다. 그 중에서도 만나자마자 곧바로 말을 트고 가까워진 친구는 리치 카너(Richard Connor)였는데 돌고래를 연구하고 있었다. 리치는 성격도 워낙 좋고 명석한 친구라 매력적이었지만 내가 그에게 하릴없이 끌린 데에는 돌고래도 한 몫 했음을 숨길 수 없다. 나는 박사 학위 과정에서 곤충을 연구했지만 언젠가 교수가 되면 꼭 연구하고 싶은 동물이 따로 있었다. 바로 침팬지와 돌고래였다.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돌고래 생물학자였다. 

리치 카너(Richard Connor) / 출처: www.umassd.edu


 리치는 그 유명한 리처드 알렉산더(Richard Alexander) 교수 연구실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는데, 나는 이내 미시건대에는 그 외에도 돌고래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이 셋이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레이철 스모커(Rachel Smolker), 앤드류 리처즈(Andrew Richards), 그리고 존 페퍼(John Pepper)였는데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같은 대학을 졸업한 동창들이었다. 산타 크루즈에 있는 캘리포니아주립대(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Cruz)에 다니던 시절 모두 그 대학에 교수로 있던 사회생물학의 대가 트리버즈(Robert Trivers)에게 영감을 받아 함께 돌고래를 연구하기로 의기투합하고 나란히 미시건대 박사 과정으로 진학했다. 1984년 이들 4인방은 리치와 레이철이 사전 조사를 마친 호주 서부 퍼스(Perth) 근해에서 남방큰돌고래(Indo-Pacific Bottlenose Dolphin; Tursiops aduncus) 연구를 시작했다. 바로 우리나라 제주 앞바다에 살고 있는 돌고래와 같은 종이다. 


 나는 이들이 나를 반기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틈만 나면 졸졸 따라다녔다. 이들의 연구는 이전의 돌고래 연구의 방향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동물행동학(ethology)의 오랜 전통에 따라 오직 등지느러미의 모양만으로 개체를 식별하며 그들의 자연 삶터에서 본연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해 돌고래 사회에 관해 예전에는 미처 모르던 수많은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암컷과 짝짓기를 하기 위해 두세 마리의 수컷이 패거리(alliance)를 형성해 협동한다는 이들의 연구 결과는 그 당시 이미 협동의 진화 분야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넷은 서로 말은커녕 눈길도 주지 않는 사이로 찢어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이들은 그 동안 주제별로 연구를 분할해 진행하고 있었다. 번번이 네 명 모두 호주 현지에 가서 연구하기에는 연구비가 모자라 순번을 정해 놓고 번갈아 가서 공동으로 기본적인 데이터를 수집하는 가운데 각자 자신만의 연구 주제를 정해 동시에 연구하는 구도를 갖추고 있었다. 리치는 수컷과 수컷간의 행동, 레이철은 암컷과 암컷간의 행동, 앤드류는 엄마와 자식간의 관계 등으로 나누는 식이었다. 하지만 암컷간의 행동을 관찰하던 중 어느 암컷과 그의 자식간의 흥미로운 행동이 보이는데 그건 자기 연구 주제가 아니니 못 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애당초부터 어색했던 할당 구도가 꼬이면서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아무리 십년지기 친구들이라도 이권이 개입되자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당사자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내 개인 연구 못지않게 그들의 연구에 푹 빠져 있던 나의 실망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네 명에게 서로 모르게 따로 같은 시각에 약속을 만들어 내 연구실에 모두 불러모았다. 어색해하는 넷을 한 방에 앉혀 놓고 그래도 명색이 교수랍시고 나는 달래도 보고 윽박지르기도 하며 화해를 시도했으나 헛일이었다. 결국 나도 화가 치밀어 문을 박차고 나가는 그들의 등 뒤에다 “돌고래의 동맹에 관해 함께 연구하기로 한 인간 네 명의 동맹이 겨우 이 정도냐?”며 돌고래보다도 못난 놈들이라고 심한 말까지 퍼부었다. 그러나 그들의 우정은 결국 거기까지였다. 지금도 돌고래 연구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친구는 리치뿐이고 나머지 셋은 제가끔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리치는 현재 다트머스에 있는 매사추세츠 주립대(University of Massachusetts at Dartmouth) 분교의 생물학과에서 교수로 지내며 돌고래 연구를 그런대로 이어가고 있다. 레이철은 뜻밖에 ‘동물들의 겨울나기’, ‘까마귀의 마음’, ‘숲에 사는 즐거움’, ‘생명에서 생명으로’ 등으로 우리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유명한 생물학자 베른트 하인리히(Bernd Heinrich) 교수와 상당한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한 후 지금은 국제환경기구 ‘생물연료 지킴이(Biofuelwatch)’의 공동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앤드류는 뉴욕시립대에서 강의 전담 겸임교수이며, 존은 국립암연구소(National Cancer Institute)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비록 이들 네 명의 끈끈했던 동맹은 불발로 끝났지만 그들이 시작한 ‘상어만 돌고래 프로젝트(Shark Bay Dolphin Project)’는 지금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그 옛날 미시건대에서 그들에게 매료돼 돌고래 열병을 앓기 시작한 나는 20년이 지난 어느 날 운명처럼 남방큰돌고래와 또 다시 얽히기 시작했다. ‘제돌이야생방류시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2013년 7월 18일 제돌이를 제주 김녕 앞바다에 풀어주는 데 성공했다. 솔직히 학자로서 늦은 감이 있지만 나는 과감하게 그리도 오래 꿈꾸던 돌고래 연구를 시작했다. 제돌이와 그의 네 친구가 바다로 돌아간 일을 계기로 장수진 연구원을 필두로 한 우리 연구진은 지금 제주대 김병엽 교수님과 함께 본격적인 돌고래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는 큰돌고래(Common Bottlenose Dolphin; Tursiops truncatus)가 흔한데 신기하게도 제주도에는 리치와 그의 친구들이 연구하던 바로 그 종인 남방큰돌고래가 살고 있어 세월이 많이 흐른 후 내가 또 연구하게 되었다. 삶은 묘하게도 이처럼 종종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야생으로 돌아간 남방큰돌고래 '제돌이' / ⓒ장수진

 제주도는 돌고래 연구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 제주 앞바다에는 남방큰돌고래가 110마리쯤 있는데 세계 다른 지역의 돌고래들과 달리 거의 깊은 바다로 나가는 일 없이 섬 주위를 뱅뱅 돌며 산다. 배를 타고 따라가거나 스쿠버다이빙 장비를 갖추고 함께 수영하면 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지만, 때마침 개발된 제주올레길에서도 종종 관찰이 가능할 만큼 그들은 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제주도의 생태관광 시장은 해마다 20%씩 성장하고 있다. 제돌이와 그의 친구들의 공이 크다. 돌고래의 행복한 미래가 제주도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제주도민의 삶과 돌고래의 삶이 오래도록 지속 가능하길 바란다.

제주도에서 돌고래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진 / ⓒ장수진,김미연



글|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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