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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명다양성재단 Sep 14. 2017

생태화가 장욱진

하늘다람쥐가 물어오는 생명도토리 #18

 학창 시절에 비누 조각은 다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비누 조각 숙제를 하지 않은 게 떠올랐다. 할 수 없이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빨래비누 한 장으로 불상을 깎았다. 그리 대수롭지 않았던 숙제가 다음 날 미술 시간에 큰 사건으로 번졌다. 책상 사이를 돌며 숙제 채점을 하시던 미술 선생님이 내 앞에 서서 내 불상을 퍽 한참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시더니 나더러 그걸 들고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쭈뼛거리며 선생님을 따라 나가 친구들 앞에 섰는데 선생님은 또 그걸 아이들한테 들어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곤 선생님은 당신의 교직 생활에서 처음으로 만점을 주시겠다는 폭탄 발언을 하셨다. 그렇게 나는 미술반에 발탁돼 한창 대학 입시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할 무렵에 엉뚱하게 난생 처음 수업도 빼먹는 ‘특권’을 누리며 미술실에서 미술전 준비를 해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선생님이 셨던 오경환 화백(前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초대 원장)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 명예교사 사업' 블로그

 그 시절 우리 학교 미술 선생님은 훗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초대 원장을 지내신 오경환 화백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조각을 시켰지만 틈틈이 데생 기초도 가르쳐 주시며 끊임없이 미대 진학을 꼬드겼다. 교내 미술전에 당시 서울 미대 김세중 학장님이 오셨는데 그 때 오경환 선생님은 나를 학장님께 소개하며 서울 미대로 보낼 테니 꼭 제자 삼아달라고 부탁까지 하셨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미술가를 향한 내 꿈은 고3 초반까지 뜨겁게 달아오르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로 무참히 접히고 말았다. 그러나 한 번 타오른 불꽃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은근한 군불로 평생을 나와 함께 했다. 

(맨 왼쪽) 최재천 교수가 대학생 인턴 시절사수 선생님이었던(맨 오른쪽) 장정순 교수

 원하는 학과에 들어가지 못한 채 시작한 내 대학 생활은 현실 부정과 도피의 연속이었다. 끝 모를 방황 속에 졸업반이 된 나는 그래도 내가 몸담은 동물학이 도대체 뭘 하는 건지는 알아보고 접더라도 접어야겠다는 마음으로 4학년 여름 방학 때 한국원자력연구소 생화학 연구실에서 뽑는 인턴에 도전했다. 그 때 내 사수 선생님은 훗날 인하대로 옮겨 봉직하시다 퇴임하신 장정순 교수님이었다. 소탈하고 유머가 넘치는 선생님께 나는 참 많은 걸 배웠고, 그 때 그 경험이 내게 대학원에 진학할 용기를 주었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제1세대 거장인 장욱진 화백의 아드님인 줄은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장욱진 화백, 덕소 화실, 1969 /  사진 제공: 장욱진미술문화재단

 금년은 장욱진 화백 탄생 100주년이다. 나는 바쁜 나머지 영화관에도 자주 못 가고, 아내가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인데도 음악회도 그저 어쩌다 가지만, 대학과 유학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일과 중에 오며 가며 미술전에는 심심찮게 들린다. 2013년 초대 국립생태원장으로 임명되어 3년 2개월간 일하는 동안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라는 지엄한 명령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전시에 온 힘을 쏟았다. 생태원 업무의 대부분은 각 부서에 위임하고 나는 점검만 했지만 전시만큼은 기획에서 홍보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직접 참여했다. 전시부서 직원들이 고마워했을지 귀찮아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솔직히 말해 자제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개미세계탐험전’, ‘세계난전시회’, ‘우리 들꽃 이야기’ 등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참신한 생태 전시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또한 ‘명화 속 동물 이야기’라는 전시가 좋은 반응을 보이자 나는 마침 다음해면 100주기를 맞는 장욱진 화백의 특별전을 해보고 싶어졌다. 그의 작품을 보며 늘 생태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에 국립생태원에 모실 수 있는 화가가 있다면 그는 바로 장욱진 화백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학 전시관인 생태원이 언감생심 장욱진 특별전을 열겠다는 게 어쭙잖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장정순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고 얼마 후 장욱진 화백의 장녀이신 장경수 경운박물관 관장님으로부터 긍정적으로 고려하겠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장욱진 생명사랑전’은 국립생태원을 찾은 관람객들로부터 말할 수 없이 큰 사랑을 받았다. 

국립생태원에서 열린 '장욱진 생명사랑전'

 대학 시절 어떤 여학생에게 잘 보이려 미술에 관해 했던 말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저는 로트렉(Lautrec)의 decadence(퇴폐), 모딜리아니(Modigliani)의 melancholy(우수), 그리고 무엇보다 샤갈(Chagall)의 fantasy(환상)을 사랑합니다.” 참으로 못 들어줄 잘난 체였다. 그 무렵 혼자 우리 근대 화가들의 전시회에도 심심찮게 다녔다. 왠지 이응노, 김기창, 박수근, 이중섭의 그림보다는 김환기와 장욱진의 그림이 좋았다. 무려 15년 동안 미국에 살면서도 기회만 닿으면 꾸준히 미술전을 찾아 다녔다. 호안 미로(Joan Miro), 파울 클레(Paul Klee), 그리고 여전히 모딜리아니와 장욱진이 좋았다. 귀국한 이후로도 어쩌다 보니 장욱진 화백의 그림이 담긴 소품들을 제법 사서 모았다. 아직도 나는 집에서 그것들이 쓰고 있다. 그 장욱진 화백의 아드님이 내게 생물학을 가르쳐주신 장정순 교수님이라는 사실은 내가 장욱진 화백에게 푹 파진 한참 후였다. 

장욱진 | 나무와 까치 (A Tree and a Magpie) | Oil on canvas, 37.5x45cm | 1988            사진 제공: 장욱진미술문화재단

 나는 2017년 5월 20일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서 ‘장욱진이 그린 세상—가족, 집, 나무, 새 … 생태’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생전에 선생님은 “나는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고 당신을 소개하셨단다. 나는 까치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1997년에 시작했으니 이제 20년차에 접어드는 장기적인 연구다. 선생님이 그린 새와 나무 그리고 집은 그 속에 살고 있는 가족과 늘 한데 어우러져 있다. 선생님은 그들이 한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서양의 풍경화에는 자연이 늘 저만치 떨어져 있다. 그러나 동양의 산수화에는 종종 인간이 포함되어 있다. 도인 같은 양반이 폭포수를 쳐다보고 있기도 하고 잘 들여다보면 숲 속 어딘가에 작은 집이 있다. 원래 서양이 자연을 더 경외했는지 모르지만 서서히 힘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그 무서운 자연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여전히 타자였다. 그에 비하면 서양의 영향을 받기 전에는 동양의 예술에는 언제나 ‘정경교융(情景交融)’의 정신이 살아 있다. 인간도 늘 그 속에 들어 있다. 평생 자연이 살아가는(生) 모습(態)을 그린 장욱진 화백은 동서양을 통틀어 매우 드문 생태화가다. 



글|  최재천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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