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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명다양성재단 Oct 19. 2017

지금도 살아 계신 소로 선생님

하늘다람쥐가 물어오는 생명도토리 #19

 1979년 미국으로 유학해 1994년 서울대 교수가 되어 귀국할 때까지 15년간의 미국 생활 중에서 9년을 나는 보스턴 지역에서 보냈다. 1983년 하버드대 개체 및 진화생물학과(Department of Organismic and Evolutionary Biology) 박사 과정에 입학해 1990년 학위를 할 때까지 7년 동안은 보스턴 바로 북쪽에 있는 도시 케임브리지(Cambridge)에 살았다. 처음 1년은 홀든 그린(Holden Green)이라는 학교 아파트에 살았고 나머지 6년은 학부 기숙사의 사감으로 엘리엇하우스(Eliot House)에 살았다. 학위를 마치고 전임강사가 된 이후에는 이웃 도시인 알링턴(Arlington)과 월댐(Waltham)에서 2년 동안 살다가 미시건대(University of Michigan) 생물학과 조교수가 되어 앤아버(Ann Arbor)로 이사했다. 

하버드 엘리엇 하우스 (사진출처: Flickr/Roger W)


 케임브리지는 찰스 강을 남쪽으로 끼고 하버드대와 MIT가 나란히 위치해 있는 교육과 연구의 도시다. 도시의 동쪽 끝으로는 플로리다 남단에서 미국 동부 해안을 따라 메인 주까지 이르는 1번 고속도로(US Route 1)가 스쳐 지나가고, 보스턴 도심 한복판에서 출발해 케임브리지를 동서로 관통하며 매사추세츠 2번 고속도로(Massachusetts Route 2)가 지나간다. 아내와 나는 대학원에서 학위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저녁에 집에 돌아오더라도 기숙사 사감으로 늘 학생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렵 가끔씩 그냥 차에 올라타 어디론가 훌쩍 떠나기를 좋아했다. 우리가 가장 자주 택한 길이 1번 고속도로였다. 그 길을 따라 달리면 뉴햄프셔와 메인 주 북쪽으로 올라가며 간간히 바다가 보이는 마을들에 들를 수 있었다. 락포트(Rockport), 뉴베리포트(Newburyport), 입스위치(Ipswich) 같은 작은 마을에서 바닷가도 거닐고 맛있는 해산물 점심도 먹고 나면 삶에 새로운 활력을 얻곤 했다. 

락포트 (Rockport)


 종종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차를 몰 기회가 생기면 나는 거의 어김없이 2번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달리다 보면 링컨(Lincoln)이라는 마을을 지나 또 다른 작은 마을 콩코드(Concord)에 접어들면 이내 왼쪽으로 월든 연못(Walden Pond) 푯말이 나온다. 엘리엇하우스에서 그저 30분이면 충분했다. 월든은 사실 연못치고는 좀 큰 편이고 호수라 부르기는 좀 부끄러운 크기다. 이곳은 바로 미국의 자연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1845년 미국독립기념일인 7월 4일부터 2년간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던 곳이다. 미국 정부는 1965년 월든 연못을 포함한 인근 숲 전체를 국립유적지로 지정했다. 연못을 뺑 둘러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빨리 걸으면 30분, 천천히 걸으면 얼추 1시간쯤 걸린다. 연못 산책로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3분의 1 조금 못 되게 걸으면 소로가 살던 통나무집 터가 나온다. 집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고, 지금은 그런 집이 있었노라 가리키는 작은 푯말만이 말없이 서 있다. 서너 평도 채 되지 않았을 단칸방 작은 집이 서 있었던 자리는 이제 바람조차 아무런 걸림 없이 스쳐 지나가는 빈 공간이 되어버렸다. 통나무집 모형은 이제 주차장과 관리사무소 근처에 만들어져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월든 연못 (사진 출처: Wikimedia/ptwo)
소로가 살던 통나무집 (사진출처: Wikimedia/RhythmicQuietude)
Tom Stohlman소로의 통나무집 내부 (사진출처: Wikimedia/Tom Stohlman)


 생태학(영어ㅡecology; 독일어ㅡOekologie)은 그리스어로 ‘집’ 또는 ‘집안’을 뜻하는 oikos와 학문의 어미인 logos가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1866년 독일의 진화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einrich Haeckel, 1834-1919)이 처음 작명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는 1866년 생태학을 “생명체와 환경의 관계를 연구하는 종합적인 과학”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내가 미시건대에서 생태학을 가르칠 때부터 채택해 사용한 교과서(Stiling, 1996)에 따르면 ecology라는 용어는 소로가 1858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미 등장했다. 그러나 용어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학문이 생겨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생태학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만일 헤켈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사실 존재의 역사 내내 생태학을 해온 셈이다. 늘 ‘생물과 환경과의 관계’를 관찰하며 살아왔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생태학이 학문으로서 입지를 마련한 것은 덴마크의 생물학자 워밍(Eugen Warming)이 1895년 브라질에서 수행한 연구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소로는 1817년 7월 12일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금년은 그의 탄생 200주년이다. 그는 1845년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부터 무려 2년 2개월 2일 동안 절대 고독과 자연에서의 자립을 실험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속세를 떠나 자연으로 회귀한 은둔자가 아니었다. 그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1837년 미국은 대공황을 겪고 있던 참이었다. 역사가 기껏해야 70년밖에 되지 않은 신흥국가로서 실로 엄청난 시련이었다. 20대 후반의 젊은 소로는 암울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을 찾아 도전에 나선 것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야생의 삶에서 그가 깨달은 교훈은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를 줄여가면 그만큼 오히려 자유의 공간이 늘어간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효과적인 경제 체제다. 하지만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은 물론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로 인해 조심스레 붕괴의 가능성을 논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경제학이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이 아니라 그가 그보다 17년 먼저 저술한 ‘도덕감정론’에서 출발했더라면 이제 와서 애써 경제 민주화라는 어색한 개념까지 들먹이며 법석을 떨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로의 가르침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가 통나무집으로 들어가던 때로부터 정확하게 100년 후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우리나라는 절묘하게도 독립한 지 70년 남짓 되는 ‘신흥’ 국가다. 소로의 방황과 고민이 지금 이 땅의 젊음이 겪고 있는 시련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가 설파한 절제와 생태적 논리는 지금 시점에도 인간의 삶에 큰 교훈이 되리라 확신한다. 내가 초대 원장으로 일한 국립생태원에는 ‘생태학자의 길’이 만들어져 있다. 2014년에는 1km쯤 되는 숲길을 ‘제인 구달의 길(Jane Goodall’s Way)’로 만들고 구달 선생님을 직접 초청해 명명식을 가졌다. 이듬해인 2015년에는 2km가 넘는 숲길에 ‘다윈-그랜트의 길(Darwin-Grant’s Way)’을 만들었다. 이로써 국립생태원 경내에는 더 이상 마땅한 숲길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용화실 못을 둘러싼 산책로를 따라 ‘소로의 길(Henry David Thoreau’s Way)’을 만들기로 하고 대충의 설계를 마쳤다. 월든 연못 산책로에 있었던 소로의 통나무집을 가능한 원래 모습대로 구현하는 계획도 세워두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예정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지난 7월 12일까지 공사를 마치고 그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명명식을 가졌더라면 많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 길을 걸으며 그의 철학을 체득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글|  최재천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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