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다람쥐가 물어오는 생명도토리 #20
간단한 생각실험을 하나 해보자. 어느 작은 연못에 물벼룩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단위생식을 하는 이 물벼룩은 정오에 한 마리가 있었는데 1분에 한번씩 번식을 하여 12시 1분에는 두 마리, 2분에는 네 마리, 3분에는 여덟 마리로 늘어나더니 자정에는 결국 온 연못을 꽉 채우고 모두 죽고 말았다. 그렇다면 연못의 절반만 채워져 있을 때는 언제인가? 그렇다. 11시 59분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부터 점점 심각해지는 연못의 환경문제를 놓고 물벼룩들이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 물벼룩은 “우리의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 곧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연못 전체가 곧 꽉 찰 것이라고 예측하기에는 아직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다” “미래가 너무 불투명해 어떤 행동을 취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등등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는 동안 시계바늘은 이미 11시 50분을 넘고 있다.
2016년 봄 세계적 베스트셀러 ‘사피엔스’를 들고 방한한 이스라엘 히브리대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교수와 마주앉았다. 조선일보에서 마련한 대담이었는데 중국에서 건강이 악화된 상태로 들어와 첫 인상은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대담이 진행되며 현생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가 길어봐야 몇 백 년이면 절멸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내가 “몇 백 년까지 걸릴 이유가 어디 있는가? 나는 이번 세기를 못 넘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정신이 버쩍 나는 듯 바짝 다가앉으며 적극적으로 대담에 임했다. 다른 모든 대담이나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그 발언을 하면 모두가 놀라 후속 질문들이 이어졌다는데 나의 뜻밖의 역습에 적이 놀란 표정이었다. 이튿날 기자로부터 나와 가진 대담이 그동안 했던 모든 대담 중에서 가장 짜릿하고 지적이었다는 그의 고백을 전해 들었다.
객관적인 평가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가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가장 탁월한 두뇌를 지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을 보면 스스로 갈 길을 재촉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동물임에 틀림 없어 보인다. 사피엔스(sapiens)는 영어로 ‘현명한(wise)’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도구를 만들었다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두 발로 제대로 일어섰다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를 거쳐 얼마 전까지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은 유럽 지역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는데 이 모든 인류를 다 몰아내고 홀로 남아 드디어 스스로를 가리켜 ‘현명한 인간’이라 부르고 있다. 나는 결코 이 자화자찬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 현명했다면 우리 주변 환경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려 놓고 그 속에서 신음하며 살고 있지 말아야 했다. 스스로 미세먼지까지 만들어 뿜어대면서 콜록거리질 않나,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우리 할아버지들은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르면 흐르는 개울물을 두 손으로 떠서 마셨는데 지금 우리는 구정물을 페트병 안에 담아둔 걸 애써 돈을 주고 사서 마신다. 두뇌 용량은 남다를지 모르지만 그걸 결코 현명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논하기 시작했다. 1987년 유엔 부른틀란트 위원회(Brundtland Commission)는 지속가능성을 “미래 세대의 요구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에서 채택된 의제 21(Agenda 21)에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 용어는 때로 ‘지속적인 발전 또는 개발’로 오해 받으며 쓸데없는 논란만 불러일으켰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경제성과 생태성의 평형을 모색하는 행위”라고 규정하는데, 그러면 개념이 한결 뚜렷해진다. 경제적 타당성(economic feasibility)을 의미하는 경제성과 “생태계의 온전한 정도(ecological integrity)”를 의미하는 생태성을 함께 보듬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대표적인 개발 문화 국가다. 개발을 하려면 지금 있는 자연을 어떤 형태로든 변형시켜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는 사람의 의견이 당연히 우선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개발론자들이 더 당당하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이 쥐어져 있다. 하지만 이제 지속 가능성을 추구해야 하는 시대에 이러한 태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환경은 미래 세대로부터 빌려 쓰는 것이다”라는 말은 너무나 많이 들어 식상할 지경이다. 하지만 말은 많이 하는데 실제로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지극히 공허한 말이 된 지 오래다.
진정 미래 세대로부터 빌린 것이라면 개발하기 전에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어떤 개발 사업이든 착수하기 전에 반드시 미래 세대와 회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미래 세대는 지금 유치원에 다시는 아이들뿐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포함해야 한다. 회의는 당연히 가상 회의가 될 것이다. 현재 세대가 먼저 개발 계획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언제부턴가 모든 개발 계획에 반드시 등장하는 ‘환경친화적’ 방식으로 개발하면 환경 피해를 최소화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경제 발전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열변을 토할 것이다. 발표가 끝나면 미래 세대 대표는 과연 무슨 말을 할까? 내가 지난 3년여 동안 충청도에서 살아본 경험을 살려 충청도 사투리로 답해 보겠다. “냅둬유. 이담에 우리가 알아서 할게유. 친절하게 미리 해주실 필요 없이유. 우리 꺼니까 우리가 알아서 개발을 하든 보전을 하든 알아서 할게유.”
바야흐로 기후변화의 시대다. 기후변화는 통섭적인 접근이 필요한 전형적인 복잡계 문제이다. 기상학과 생물학을 비롯한 여러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경제학, 사회학 등 여러 사회과학적 분석과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날 삶의 문제들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 등 그야말로 모든 학문이 한데 어우러져야 문제의 원인과 적응 대책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진실은 앨 고어가 얘기한 것보다 훨씬 더 불편해 보인다. 그리고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보다 아주 조금씩이나마 더 불편한 삶을 감수하겠다는 우리 모두의 의지에 달려 있다. 기후 변화에 관한 강연을 할 때마다 나는 거의 언제나 “아주 불편한 진실과 조금 불편한 삶”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기후변화는 이미 우리 인간의 힘으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의 그림자가 너무나 길게 드리워 있어 지금 당장 우리가 대오각성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수십 년은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 그렇다고 예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비록 우리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아이들을 위해 지금 당장 행동에 옮겨야 한다. 그 아이들의 행복을 갉아먹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지속 가능성의 개념임을 명심하자.
글| 최재천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