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보낸 하루

다시 시작한 스페인어

by 유승희

스페인어


묵혀둔 스페인어책을 꺼냈다. 빛바랜 스페인어 공책도 옆에 꽂혀 있었다. 안을 살펴보니 세 바닥을 넘기지 못했다. 공백의 다음 페이지가 왠지 쓸쓸해 보인다. 캠핑하며 간밤에 꺼져버린 화로 같다. 활활 타오르다가 뚝 끊겨버린 장작과 새벽이슬 덕에 습기까지 머금은 재만 남은 화로다. 3개월 만에 제대로 느껴보는 나만의 아침이었다. 제목에 ‘첫걸음’ 글자가 보였다. 아이의 첫걸음 하던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양육하며 새롭게 와닿는 글자다. 책을 꺼내 폴란드 화가 친구의 그림이 그려진 가방에 넣었다. 서촌 한 책방에서 산 볼펜도 챙겼다. 펜 끝이 부드러워 필체가 살아나는 좋은 펜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공부 시간을 확보해 콧노래가 난다. 서두르지 않아도 혼자 마음껏 할 수 있는 긴 시간을 확보하면 마음이 평온하다. 아이 등원 길이 설렘으로 가득하다.


아이 차량이 왔다. ‘오늘 좀 추운가. 아이 바람막이가 얇은가?’ 끝없는 불안이 다시 엄습할 것 같아 생각을 멈췄다. 작은 고민은 꼬리를 물고 불안을 품으러 간다. 패턴을 알게 되니 대처할 수 있다. 번아웃의 시간이 절대 헛되지 않았나 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곧장 카페로 갔다. 8시 40분.

늘 네 번째 책상에 앉았는데 오늘은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냄새’라는 지난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그분’이 세 번째 자리에 앉기 때문에, 두 번째 자리를 공략해 보았다. 대비를 마쳤으니 신경 쓸 일이 없다. 은근히 공부가 잘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오전 8시 45분부터 10시 45분까지 꼬박 2시간을 집중했다. 제대로 된 스페인어 공부를 해본 게 얼마 만인가. 분명 이번 공책은 모두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무기력한 몇 달에서 얻은 교훈이 있다. ‘미루지 않고 천천히 하기.’ ‘불안할 때는 명상하기’ ‘채찍질로 나를 나아가게 하던 30대를 벗어나 스스로 칭찬하는 40대로 살아가기’ ‘목표를 멀리 잡지 않기’ ‘아이가 우선이 되는 지금을 잘 누리기’



ésta, esta, está


10대부터 30대까지 자아비판은 발전 있는 나를 위한 좋은 도구였다. 40대의 자아비판은 나를 병들게 한 원인이 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비판하기 시작하니 지금까지 이뤄놓은 것들이 때론 하찮게 느껴졌다. 10대부터 30대까지는 사회생활의 꽃을 피워가는 시기였기에 자아비판이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40대의 자아비판은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과 마주하며 상실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상실감과 무력감은 이내 우울감으로 연결되면서 힘든 시간을 자초한다.


피곤하도록 파고드는 성향은 외국어를 공부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 세상 이치가 그렇듯 모두 나쁘란 법도 없고, 모두 좋으란 법도 없더라. 자신을 스스로 힘들게 하는 부분이 외국어를 배울 때는 장점으로 바뀐다.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작업이 즐겁다. 앞에서 본 적 있던 단어, 비슷한 생김새, 분명 모두 아는 단어임에도 다른 뜻이 되어버리는 신비로움. 외국어를 배우면서 느끼는 짜릿하고 달콤한 순간이다. 틀릴 만한 부분을 찾아내 정리 해둔다. 쉽게 불안해하는 성격이 주는 장점이다. ésta, esta, está 세 가지 단어가 인제야 보인다. 10년 전만 해도 잘 보이지 않던 부분이었다.

나에게 외국어는 기본기를 1년은 반복하고 전체적인 숲을 본 뒤에 다시 살펴보는 공부법이 제일 잘 맞다. ‘한 장을 한 번에 끝내버린다.’라는 공부법은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같은 책을 최소 10번 돌려야 그제야 비구름이 걷히고 길이 보인다. 책 속에 예문을 자세히 보기 때문에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외국어를 배우는 방법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뭐가 더 좋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각자 취향이 있는 것처럼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영어, 일본어를 터득했다. 나는 그저 지독하게 한 권을 파고드는 게 좋다. 앞 어딘가에서 본 적 있던 것을 찾아가기, 찾은 후 찾아오는 기쁨, 환희. 기억해 낸 것에 대한 칭찬. 역시 나는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힘들면서 좋다.



청소와 음악


스페인어 공부를 두 시간, 책도 한 시간 보고 필사도 했다. 공부하며 적고, 책에서 읽은 중요한 부분을 공책에 기록했다. 세 시간을 집중하였더니 뒷목이 뻐근하다. 공부하고 책 읽는 동안 냄새를 풍기며 어김없이 ‘그분’이 들어왔다. 예상했던 뒷자리로 가지 않았고, 또다시 내 앞자리에 앉았다. 마스크를 조용히 꺼내썼다. 냄새가 덜 들어왔다. 마스크 안 날숨 덕에 반복적으로 안경에 뿌옇게 김이 서린다. 냄새의 2/3를 줄인 샘이니 나의 준비성을 칭찬한다.


집으로 돌아와 음악을 틀었다. 해야 할 일을 책상 위 우편 봉투 빈칸에 적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마음이 급해 올 때면 눈을 감고 속으로 외친다. ‘하나만 해. 한 개 하고 다시 생각하자.’ 이제는 쉬이 되지만 몇 달 동안 해내지 못했다. ‘인생은 가끔 내 맘 같지 않을 때가 있지.’ 스스로에게도 다정한 사람이 되어준다. 지난주 미루고 미루던 청소기 AS센터도 다녀왔다. 청소기 부속품도 새로 샀다. 방전된 배터리도 새로 구매했다. 완충해도 10분 사용하면 방전되는 애물단지 청소기는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부속품과 건전지값이 값이 꽤 나갔긴 하지만, 관리를 잘했다는 칭찬과 배터리 가격 할인행사 덕에 기분 좋았다.


청소기 모터 소리를 들으니 아들 비염이 다 나을 것만 같다. 먼지, 애견 알레르기가 있어 관리가 소홀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청소를 두렵게 했던 지난날들이여 안녕. 그냥 하면 된다. 생각이 많으면 생각하지 않으려 몸을 일으킨다. 움직인다. 그러면 잠시 잊힌다. 잊다 보면 다시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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