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ward Willis Redfield
할머니의 하루
아침
아침 6시. 의사인 며느리가 커피 한잔은 괜찮다고 해서 물을 올렸다. 팔십 평생 즐겨 마시던 커피를 끊으라 할까 노심초사했다. 참 다행이다. 아들 며느리가 잔소리가 있는 편이라 어느새 어릴 때 잔소리하던 내가 겹친다. 가끔은 전화를 모른척 끊고 싶다. 살날이 얼마라고 하고픈 그것도 못 하게 하나 싶기도 하다. 다 나를 위한 건데 배부른 소리 한다며 주위 할망구들이 한소리씩 한다.
아침 6시 10분. 커피 향이 번진다. 지난번 아들 내외가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늘 내가 꿈꾸며 살고파 했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사 왔다. 이 커피는 유독 향이 그윽하다. 이탈리아 피렌체 여행할 때마다 꼭 들러서 여러 개 사는 커피다. 고맙게도 동네 슈퍼에 늘 있어 주는 거라 접근하기도 쉽다. ‘MANARESI CAFFE’ ARABICA’ FIRENZE DAL1898 에스프레소용 그라운드된 커피다. 진한 향이 흐트러짐 없다. 한국에서 사기란 일곱 배 정도 높은 가격이라 이탈리아 피렌체 여행 때 지인이나 아들 내외가 사준다. 이탈리아는 또 언제 가볼꼬. 내 영혼의 고향. 다음에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아침 8시. 아침잠이 많던 내가 할머니가 돼보니 밝은 아침이 좋아졌다. 뉴스 소리로 세상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니 내 아침도 바삐 꿈틀거리는 느낌이다. 바삐 달려온 인생이 지금의 느긋함을 만든 걸까. 아들 문자가 도착했다. ‘엄마 Good morning! 편안히 잘 주무셨소?’ 오늘은 왠지 일어날 때 왼쪽 무릎이 따끔했다.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는 모양이다.
점심
오전 11시 30분. 하루 첫 끼를 먹어볼까. 아침 6시부터 일어나 커피 향만 맡았다. 영 입맛이 없고 입이 까끌하다. 며칠째 이러는 걸 알면 아들 내외가 또 잔소리할 것이 뻔하니 나만 아는 비밀에 부친다. 손자 손녀는 걱정하다 울기까지 하니 잘 먹고 잘 자야지. 멜라토닌이 바닥을 보이던데 그거라도 이야기해 주면 금세 할 일이 생겨 좋아한다. 아침 겸 점심을 차려볼까. 아 우리 집 양반이 언제 오려나 기다리다 함께 먹을까 그냥 혼자 요기해 볼까. 인생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선택의 연속이다. 이정도 작은 선택도 참 고맙다. 집에 오는 길에 토스트라도 사 오라고 문자라도 넣을까. 햄 치즈보다는 베이컨이 낫겠지 싶다.
정오 30분. 친구 만날 일이 생겼는데 오늘은 집에서 간단히 보자고 했다. 왼쪽 무릎이 따끔한 아침 기억이 살짝 스쳐 지나가서다. 절뚝거리는 노인네 걱정시키는 것이 왜 이리도 적응이 안 되는가 싶다. 휠체어 안 타는 것 만 해도 감사한데 가끔 내 마음은 노인이 아닌 것이 참 그렇다. 지금에 만족하자. 영차 하고 다시 일어나 그릇 정리 해본다.
오후 2시. 친구가 다른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와도 되냐기에 흔쾌히 좋다고 했다. 좋다고 말하곤 살짝 긴장했다. 만나보니 편안한 인상이라 마음에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친구와 하다가 소외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군. 아가씨 때는 눈치를 보았다. 할머니가 되고 나니 상대방에게 부드럽게 물어보는 능력이 생겼다. “친구랑은 사십년지기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아는데 혹여 소외감 느끼실까 걱정이네요. (방긋)” 처음 보는 사람 집에 놀러 온 할미도 보아하니 붙임성이 좋을 것 같아 슬며시 운을 띄웠다. “아이고 두 분 이야기하시는 거 듣고 저는 더 알아갈 수 있는데요. 정보 저장!” 역시 보통 할멈이 아니었다.
저녁
오후 5시. 할아비가 집으로 왔다. 차를 요란하게도 몰고 트렁크 닫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뭘 또 사서 들고 오나 보다. 걸음걸이가 신명 난 걸 보니 내 것은 아니구나. 돈, 돈 하며 아들 키우던 40대에 사고 싶은 걸 자주 못 사게 했더니 80세 노인이 참 갖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다. 그래서 늙지 않았나 보다. 아직도 보면 소년 같고 그렇다. 나이 들어 키가 줄어도 장신이다. 나와 25센티미터 키 차이가 났다. 옷 관리도 얼마나 잘하는지 아직도 예전 옷을 즐겨 입는다. 아침부터 뭘 하러 다녔는지 이야기나 들어야겠다. 그렇다고 같이 나가자고 한다면 고민을 해봐야겠다.
오후 6시 반. 저녁을 먹고 나니 달콤한 게 당긴다. 약과 남은 게 냉동실 어디 있던 것 같던데 요즘은 뭘 찾는 게 귀찮아 자꾸 할아비를 시킨다. 가위바위보를 하잖다. 아이고 내 인생. 이런 것도 하나 시키면 재깍 가져오는 남자를 고를 것이지. 영 낭패다. 이겼다. 이기니 재밌다. 언제나처럼 한 번에 찾는 법이 없다. 결국 내가 일어서서 약과를 찾았다. "영감탱이!" 라고 놀리며 약과를 한 입 베어 물곤 나눠주지 않는 것으로 복수한다.
저녁 8시. 산책도 20분 했겠다. 텔레비전도 틀어두고 남편 일과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과묵한 남자에게 반해 결혼했는데 이제는 내가 과묵하고 상대는 수다쟁이가 되었다. 부부는 닮는다던데 반대가 된다고 하는 말이 더 맞다. 40대에는 “여보,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재미없어 정말!” 툴툴거리며 자주 토라지곤 했는데 지금은 이 말을 말하고 싶다. “여보, 뭘 그렇게 할 말이 많은겨. 물 좀 마시면서 말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