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말하신다면, 멋쩍은 표정으로 "아, 나의 이번 로마 여행 경험에서 원픽이에요..."라고 소심하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나의 원픽에 의심을 품지 않을 거라고 말할 수 있다.
"보르게세 미술관"
여행 좀 다녀본 사람이거나,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갔다 와 봤거나 들어 봤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곳인 모양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우선, 보르게세 미술관이 아니더라도 로마는 봐야 할 게 너무나 많은 곳이다.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가 여행 기간인 (그나마도 앞뒤로 출입국을 2,3일씩 빼 버리면 남는 건 며칠 안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누구나 아는 로마의 유명 관광지 몇 개만 나열해도 날짜가 금방 차 버린다.
"미술관"이라는 곳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성향도 한몫할 것이다. 안 그래도 성당, 박물관, 미술관이 즐비한 유럽에서, 한국에 와서 친구들한테 자랑해 봤자 그게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굳이 시간 할애하고 아픈 다리 주무르며 잘 생각하면서도 갈 열정을 가진 이들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역시 보르게세 미술관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이곳이 예약제로 입장하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워낙에 인기가 높아 가까운 시일에는 금방 예약이 차 버린다. 게다가, 요즘에야 인터넷으로 예약이 가능하지만, 예전에는 전화로만 예약을 받았고, 그마저도 영어가 거의 안 통했다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난이도 최상의 퀘스트였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여행사에서도 가지 않는 곳이 되고, 블로그 여행기에서도 좀처럼 찾기 힘든 곳이었다.
최근에는 그래도 남들과 다른 곳을 찾아가려는 이들이 많아져서 블로그에서 찾기가 쉬운 편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다른 여행지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수가 적고,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숨은 맛집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어떤 기회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곳에서 이곳의 정보를 들었다. 왜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뭐? 이렇게 대단한 작품들이 있는 곳인데 왜 우리한테는 알려지지 않은 거야?'라고 놀랐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남들 모르는 곳이니 갔다 와서 우쭐대 보기나 하자는 마음을 품었던 것도 같다.
다행히 인터넷으로 우리의 일정에 맞게 관람 예약을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관람 시간은 정해진 시간대를 선택해야 하고, 2시간 간격이다. 미술관이 그렇게 큰 곳은 아니라 2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하니, 다리가 아플까 봐 걱정까지 하진 않아도 되겠다.
예약된 출입 시간에 늦으면 들어가는 데 문제가 있을 거라는 얘기도 있어서, 꽤 일찍 도착했다.
여기가 바로 보르게세 미술관. 뭐, 유럽 미술관 치고는 아담해 보이는데?
오늘은 날씨도 좋아서 노니는 기분이 난다.
보르게세 미술관이 있는 보르게세 공원은 17세기 보르게세 추기경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많은 로마 시민들이 휴식 차, 운동 삼아 오는 곳이라고 한다. 규모에 비해 대충 있는 대로 별 꾸밈없이 누리는 것 같아 보이는 건 이탈리아 다운 분위기다.
우리의 입장 시간이 되었을 때 입구로 찾아갔다. 아니, 이렇게 작은 문이 입구? 저택을 미술관으로 만들었다지만, 입구가 이렇게까지 좁을 건 뭔가?
여기가 입구. "입구 맞아?" 하면서 들어갔다.
예약할 때부터 엄청 까다로운 조건의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말도 잘 안 통하는 여기서 입장권을 받을 때까지 어떤 돌발 사고가 생기진 않을까 가슴을 졸였는데, 웬걸, 인터넷 예약한 스크린샷을 핸드폰으로 보여줬더니, 뭐 읽어보는 시늉도 안 하고 입장권 두 장을 찍어서 주고는 다음 사람을 불렀다.
역시 이것이 이탈리아의 기상?!
예약된 사람만 티켓을 찾을 수 있는 티켓 부스. 근데 진짜 체크는 하고 주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냉큼 티켓을 주더라.
드디어 미술관 입장!
아앗?!?!?!?!?!?! 이게 뭐지? 큰일이야, 큰일!
인간적으로 누가 언제 그린 건지 정도는 써 놔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벽면에 온통 그림, 그림, 그림, 그림. 그것 말고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냥 "우와아~~~~... ... ... 근사하네... ..."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을 뿐 아니라, 그림의 설명은 커녕 제목도, 작자도 아무것도 쓰인 게 없다. 마치 보르게세 추기경이 17세기부터 권세를 과시하려고 집 벽에다 잔뜩 걸어둔 그림들이 300년 넘도록 그대로 있었던 것 같은 모양새다.
뭐, 어쩌겠는가. 어차피 모르는 것들은 나중에도 모를 것이니, 알만한 것들을 찾아가 보자.
그래서 어쨌든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들이 바로 로렌초 베르니니의 걸작 조각품들.
일단 이 조각품들은 책에서 자주 봐 왔던 조각품들이다. 그렇게 아는 체하고 다가가 보니... 이건... 뭐... 아는 거다 마는 거다 말할 필요가 없는 그런 것이다. 그냥 입이 떡 벌어지게 하는, '이게 사람 손으로 만든 거라고?'라는 경외가 저절로 생기는 그런 것이다.
누구라도 한 번쯤 봤을 그 조각상!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
떨어지는 눈물, 움푹 파인 피부. 이게 진짜 돌로 만든 것 맞아? 하고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음험한 눈빛이 움직이면 옆구리 근육도 불끈대며 움직일 것만 같다.
천에다 석고물 묻혀서 굳힌 건 아니겠지...라는 뻘생각을...
다프네를 쫓는 아폴론. 그리고 월계수로 변해버리는 다프네
아폴론 오른쪽 허리춤의 천 너머로 빛이 비쳐 보일 정도다. 이거 대리석이잖아?!
저 입술과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저 돌에 맞으면 머리통이 날아가지 않을까?
힘이 들어간 팔뚝이며, 돌을 맨 슬링(끈)이며 대리석으로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아마 보르게세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베르니니의 조각품들에 대해 비슷한 표현들을 할 것이다. 핏줄이 보이는 듯한 피부, 하데스가 손으로 움켜쥔 곳에 자국이 나는 여린 페르세포네의 다리, 어찌나 얇게 깎았는지 빛이 비쳐 보이는 옷자락 등등. 들을 때는 뭐 그냥 "상투적 표현"이라는 상투적 표현으로 흘려보냈던 이야기인데, 눈앞에서 보니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물론 제일 유명하고 상징적이지만, 조각상 자체의 인상만 본다면 나는 역동적이고 결연한 투지를 뿜어내는 베르니니의 이 다비드 상에 더 눈길이 갈 것이다.
베르니니의 걸작들만 보더라도 이미 감동은 임계치를 넘어가지만, 보르게세 미술관엔 이것만 있는 게 아니다. 역시나 책에서 자주 보는 카라바조, 라파엘로, 보티첼리, 티치아노의 그림 등 걸작들이 걸려있다.
카라바조의 바쿠스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도 같은 주제의 다른 그림이 있다.
천장에 있었는데 누가 그린 무슨 그림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ㅠㅠ
보르게세 미술관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눈부신 미술품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건드리면 부서질까 걱정될 정도의 베르니니의 조각상들이 아무런 보호 수단 없이 방 중간에 덩그러니 있다. 지켜보는 직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충이라도 둘러쳐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라는 울타리 같은 것도 없다. 가까이 가면 안 되는 규칙이 있는 걸 혹시 나만 모르는 거 아닌가 싶어 두리번거리며 다른 관람객 눈치까지 봐 가며 조각상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지만, 그게 이곳의 방식이었다.
이건 뭐 충격이라고 해야 할지... 이게 이탈리아의 쿨함인가? 그래서 바티칸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은 그 고초를 겪은 거 아닌가? 하긴, 그러고는 피에타상만 방탄유리로 막아놨지 다른 미술품은 그대로인 걸 보면 이게 이탈리아의 쿨함이 맞나 보다.
그렇게 호기롭게 전시된 걸작을, 예약제로 입장하여 여유롭게 감상을 하며 돌아다니니, 이건 정말로 보르게세 추기경의 집에 초대받아 그의 권세를 경탄하며 추켜세워 주는 손님 역할만 잘 해내면 될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