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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강사 Jun 29. 2017

팡라오 가는 길

프리다이빙-03 | 이거야 말로 일상의 탈출 | 2014년 10월

회사일로 이것저것 골머리가 아프던 2014년의 9월, 보홀로의 프리다이빙 여행 계획을 잡았는데 또 상사로부터 급한 미션을 받았다. 이거 어쩐다, 휴가는 당장 이번 주말부터고, 이 미션은 금방 끝날 일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소심한 성격, 이제 회사 눈치 보며 다닐 짬밥은 아니라고 부르짖던 기개는 어디 가고 미션을 설명하시는 상사 손끝만 바라보며 무슨 설명인지는 알 길이 없고 이걸 대체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내나 안절부절못하며 타이밍을 못 잡고 있었다. 상사가 열심히 설명을 마치시고는 기대 섞인 눈빛으로 나를 보며 "어때요, 가능하겠죠?"라고 물었다. 타이밍도 더럽게 못 잡지,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 시간을 끌고 있으면 어떡하나. 그래도 어쩌리 내 휴가는 내가 지켜야지.


나: "팀장님, 근데 저... 이번 주말에 휴가 계획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한 번 말씀을 드리기도 했고..."...

      '아... 이 나이 이 경력이 되도록 휴가 얘기에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설마 가지 말라고는 안 하겠지만 실망하시겠지?'


우물쭈물 불편한 간극의 시간이 체 가기도 전에,


팀장: "아니, 휴가 얘기를 뭐 그렇게 조심스럽게 얘기해요? 다녀오세요. 그럼 이 얘기는 휴가 다녀와서 합시다."

나: "아... 제가 이 회사에서 10년 동안 그렇게 버릇이 들어서..."

팀장: "그런 나쁜 버릇은 우리 빨리 없앱시다. 하하하"


헐! 세상에 이런 쿨한 상사가 다 있나. 오랜 미국 생활로 소위 "미국식" 마인드를 가지고 계신 상사와 일한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난다. 골치 아픈 일들은 휴가를 다녀와서도 그대로겠지만, 그래도 휴가 동안만은 마음 놓고 다녀오게 해 주는 이런 상사들이 이 땅에 가득하길!


직속 상사의 능동적인 지원은 휴가 나서는 마음을 더욱 들뜨고 흥분하게 했다. 프리다이빙을 배우러 간다는 것도 흥분을 배가시켰다. 퇴근 후 짐을 챙기고 공항으로 향했다. 늦은 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직 어둡기만 한 시간에 마닐라에서 내렸다. 일찍 공항을 나서고 싶어 짐도 따로 부치지 않고 다 들고 탔건만, 입국심사가 길어지더니 나와보니 비행기에 실렸던 짐들은 이미 다 나와 있더라. 힘들게 짊어지고 온 보람이 없네. 새벽의 잠깐 남은 시간을 마사지샵에서 자는지 마는지 잠깐 눈을 붙이고는 마사지샵에서 제공해 주는 차를 타고 항구로 왔다. 원래 예약해 두었던 배 시간은 8시였지만, 우리가 일찍 오는 바람에 6시 배를 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계획을 책임지고 있던 Angela 강사님이 잠깐 기다리라고 그러면서 표를 들고 티켓 창구로 가더니만, 한참을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결국 6시가 지나버렸다. 아쉽게 됐군, 2시간 동안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Angela 강사님이 긴 머리 휘날리며 달려오더니만, "타! 타! 타! 타!" 호들갑을 떨며 짐을 들고 뛰기 시작했다. 이게 웬 난리람, 우리도 짐을 들고 뛰었다. 배를 타기 직전에 항구 직원들이 다시 짐 부치고 타래서 다시 짐 들고 수하물 센터 가서는 짐을 던지듯이 부치고 짐표를 받아 후다닥 배에 오르니 우리 뒤로 바로 배의 문이 닫혔다. 허헛. 결국 6시 배를 타다니 이게 웬 호들갑인지. 급히 티켓을 바꾸느라 편한 비즈니스석을 이용하지는 못하지만, 2시간을 번 것으로 만족을 할 수밖에.


옛날 부산 구덕 야구장에서나 본 것 같은 의자에서는 도통 편한 자세를 잡을 수 없지만 쏟아지는 잠에 버틸 수가 없다. 그렇게 비몽사몽 2시간 정도를 달려 보홀 따그빌라란에 도착했다. 빨리 리조트로 가서 한두 시간이라도 쉴 수 있기를. 그런데 이게 웬일? 우릴 기다려주리라 생각했던 픽업이 보이질 않는다. 원래 우리가 오기로 한 시간보다 2시간 일찍 온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리조트에서 아직 그 메시지를 안 읽은 모양이다. 우리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자 주위에서 택시와 픽업 기사들이 날파리 떼마냥 들러붙는다. 어딜 가냐, 얼마 해 주면 되냐, 하면서 가격을 제시하고, 우리가 자리를 옮기자 이들도 우리를 따라왔다. 어째어째 리조트와 연락이 닿아 얘기를 하니, 급히 연락된 픽업 기사가 곧 우릴 찾을 거라고 얘기해 준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덥다. 빨리 에어컨  빵빵한 차가 와 줘야 할텐데...


한 몇 분 지났을까? 옆에서 "비타옥? 안젤라?" 하면서 우리의 목적지를 아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이 아저씨들은 아까 우리한테 열심히 호객하던 아저씨들이잖아? ㅋㅋㅋ 우리가 내야 할 돈이 아까 제시하던 금액보다 적어졌다. 날파리 때 같다는 말은 취소할게요.


아까 한참 호객하던 아저씨들이 결국 우리를 태우러 왔다. 아마 리조트에서 급히 찾은 택시가 우연히 그리된 거겠지.


우리가 머물 리조트는 비타옥 ("Bita-ug"). 허름해 보이지만, 이 동네에서 아주 오래된 집이라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곳이라 한다. Bita라는 큰 나무 두 그루가 해변을 바라보며 대문처럼 서 있어서 이런 이름이라고. 


비타옥 리조트의 전경. 시원하게 보이는 앞바다가 근사하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해변의 리조트에서 집을 나선 지 12시간 만에 대접받은 아침 식사는 짜파구리. 난 분명 이 곳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짜파구리면 아무 때나 맛나는데 지금처럼 허기진 때라면 어찌 아니 맛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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