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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라오 가는 길

프리다이빙-03 | 이거야 말로 일상의 탈출 | 2014년 10월

by 탱강사

회사일로 이것저것 골머리가 아프던 2014년의 9월, 보홀로의 프리다이빙 여행 계획을 잡았는데 또 상사로부터 급한 미션을 받았다. 이거 어쩐다, 휴가는 당장 이번 주말부터고, 이 미션은 금방 끝날 일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소심한 성격, 이제 회사 눈치 보며 다닐 짬밥은 아니라고 부르짖던 기개는 어디 가고 미션을 설명하시는 상사 손끝만 바라보며 무슨 설명인지는 알 길이 없고 이걸 대체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내나 안절부절못하며 타이밍을 못 잡고 있었다. 상사가 열심히 설명을 마치시고는 기대 섞인 눈빛으로 나를 보며 "어때요, 가능하겠죠?"라고 물었다. 타이밍도 더럽게 못 잡지,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 시간을 끌고 있으면 어떡하나. 그래도 어쩌리 내 휴가는 내가 지켜야지.


나: "팀장님, 근데 저... 이번 주말에 휴가 계획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한 번 말씀을 드리기도 했고..."...

'아... 이 나이 이 경력이 되도록 휴가 얘기에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설마 가지 말라고는 안 하겠지만 실망하시겠지?'


우물쭈물 불편한 간극의 시간이 체 가기도 전에,


팀장: "아니, 휴가 얘기를 뭐 그렇게 조심스럽게 얘기해요? 다녀오세요. 그럼 이 얘기는 휴가 다녀와서 합시다."

나: "아... 제가 이 회사에서 10년 동안 그렇게 버릇이 들어서..."

팀장: "그런 나쁜 버릇은 우리 빨리 없앱시다. 하하하"


헐! 세상에 이런 쿨한 상사가 다 있나. 오랜 미국 생활로 소위 "미국식" 마인드를 가지고 계신 상사와 일한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난다. 골치 아픈 일들은 휴가를 다녀와서도 그대로겠지만, 그래도 휴가 동안만은 마음 놓고 다녀오게 해 주는 이런 상사들이 이 땅에 가득하길!


직속 상사의 능동적인 지원은 휴가 나서는 마음을 더욱 들뜨고 흥분하게 했다. 프리다이빙을 배우러 간다는 것도 흥분을 배가시켰다. 퇴근 후 짐을 챙기고 공항으로 향했다. 늦은 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직 어둡기만 한 시간에 마닐라에서 내렸다. 일찍 공항을 나서고 싶어 짐도 따로 부치지 않고 다 들고 탔건만, 입국심사가 길어지더니 나와보니 비행기에 실렸던 짐들은 이미 다 나와 있더라. 힘들게 짊어지고 온 보람이 없네. 새벽의 잠깐 남은 시간을 마사지샵에서 자는지 마는지 잠깐 눈을 붙이고는 마사지샵에서 제공해 주는 차를 타고 항구로 왔다. 원래 예약해 두었던 배 시간은 8시였지만, 우리가 일찍 오는 바람에 6시 배를 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계획을 책임지고 있던 Angela 강사님이 잠깐 기다리라고 그러면서 표를 들고 티켓 창구로 가더니만, 한참을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결국 6시가 지나버렸다. 아쉽게 됐군, 2시간 동안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Angela 강사님이 긴 머리 휘날리며 달려오더니만, "타! 타! 타! 타!" 호들갑을 떨며 짐을 들고 뛰기 시작했다. 이게 웬 난리람, 우리도 짐을 들고 뛰었다. 배를 타기 직전에 항구 직원들이 다시 짐 부치고 타래서 다시 짐 들고 수하물 센터 가서는 짐을 던지듯이 부치고 짐표를 받아 후다닥 배에 오르니 우리 뒤로 바로 배의 문이 닫혔다. 허헛. 결국 6시 배를 타다니 이게 웬 호들갑인지. 급히 티켓을 바꾸느라 편한 비즈니스석을 이용하지는 못하지만, 2시간을 번 것으로 만족을 할 수밖에.


옛날 부산 구덕 야구장에서나 본 것 같은 의자에서는 도통 편한 자세를 잡을 수 없지만 쏟아지는 잠에 버틸 수가 없다. 그렇게 비몽사몽 2시간 정도를 달려 보홀 따그빌라란에 도착했다. 빨리 리조트로 가서 한두 시간이라도 쉴 수 있기를. 그런데 이게 웬일? 우릴 기다려주리라 생각했던 픽업이 보이질 않는다. 원래 우리가 오기로 한 시간보다 2시간 일찍 온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리조트에서 아직 그 메시지를 안 읽은 모양이다. 우리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자 주위에서 택시와 픽업 기사들이 날파리 떼마냥 들러붙는다. 어딜 가냐, 얼마 해 주면 되냐, 하면서 가격을 제시하고, 우리가 자리를 옮기자 이들도 우리를 따라왔다. 어째어째 리조트와 연락이 닿아 얘기를 하니, 급히 연락된 픽업 기사가 곧 우릴 찾을 거라고 얘기해 준다.


사진 2017. 6. 25. 오후 10 20 21.jpg 이른 시간이었지만 덥다. 빨리 에어컨 빵빵한 차가 와 줘야 할텐데...


한 몇 분 지났을까? 옆에서 "비타옥? 안젤라?" 하면서 우리의 목적지를 아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이 아저씨들은 아까 우리한테 열심히 호객하던 아저씨들이잖아? ㅋㅋㅋ 우리가 내야 할 돈이 아까 제시하던 금액보다 적어졌다. 날파리 때 같다는 말은 취소할게요.


사진 2017. 6. 25. 오후 10 20 29.jpg 아까 한참 호객하던 아저씨들이 결국 우리를 태우러 왔다. 아마 리조트에서 급히 찾은 택시가 우연히 그리된 거겠지.


우리가 머물 리조트는 비타옥 ("Bita-ug"). 허름해 보이지만, 이 동네에서 아주 오래된 집이라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곳이라 한다. Bita라는 큰 나무 두 그루가 해변을 바라보며 대문처럼 서 있어서 이런 이름이라고.


사진 2017. 6. 25. 오후 10 20 36.jpg 비타옥 리조트의 전경. 시원하게 보이는 앞바다가 근사하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해변의 리조트에서 집을 나선 지 12시간 만에 대접받은 아침 식사는 짜파구리. 난 분명 이 곳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사진 2017. 6. 25. 오후 10 20 41.jpg 짜파구리면 아무 때나 맛나는데 지금처럼 허기진 때라면 어찌 아니 맛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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