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은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세계적인 관심과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국내에서는 흥행 참패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영화 전체를 둘러싼 모호함과 해석의 여지가 분분한 장면의 연속이 관객들의 호불호를 나눈 탓이다.
종수(유아인)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그녀에게서 아프리카 여행을 간 동안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스티븐 연)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하고, 어느 날 벤은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으로 찾아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에 대해 고백한다. 그때부터 종수는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혀 강박적으로 비닐하우스를 확인하고, 갑자기 종적을 감춘 해미의 흔적을 찾아 벤을 추적한다. 과연 이들에게 벌어진 진실은 무엇일까?
영화를 본 관객들은 혼란에 빠진다. 해미의 고양이는 정말 있었던 걸까? 해미가 어린 시절 빠졌다는 우물은? 갑자기 사라진 해미는 죽은 걸까? 만약 죽었다는 그녀는 벤에게 살해당한 것인가? 영화의 열린 결말은 무수한 심증과 추측을 남기지만, 그 어떤 물증도 보여주지 않기에 관객은 끝내 진실과 허구를 구분할 수 없다.
영화 ‘버닝’의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30여 년 전에 발표한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이다.
찾을 수 없는 진실의 실마리에 대한 기대감 덕분인지 영화를 본 후 원작에 대한 관심을 두는 이가 많지만, 영화에서 찾지 못한 정답을 찾기 위해 눈을 돌린 거라면 원작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애당초 30쪽도 안 되는 짧은 소설에서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무언가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이창동 감독이 관념과 은유의 결정체인 이 단편을 얼마나 훌륭하게 재창조했는지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감독은 두 시간 반 분량으로 늘리기 위해 소설 속 메타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증폭시켰다. 이로 인해 영화의 등장인물과 줄거리, 사건들은 당연히 달라졌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여자와 애매한 만남을 이어가는 서른 살의 작가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삭막한 환경에서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청년으로 변경됐고, 종수의 해미에 대한 사랑과 집착, 그리고 의심은 소설의 남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소설이 보여주는 주요 메시지와 메타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치 초사이언으로 거듭난 만화 ‘드래곤볼’의 손오공처럼, 엄청나게 심화한 버전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메타포를 말이다.
물론 영화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것처럼 영화와 소설의 차이에 대한 견해 역시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직접 체험해보길 추천한다.
통플러스 에디터 김정아 jungy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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