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용호 Feb 05. 2019

9. 니 마음을 훔치는 도둑.

11월 5일, 셋째 날

 호주에서 처음으로 맞이했던 불타는 금요일. 백인 경찰이 총을 꺼내며 나에게 다가오는 있었다.


 그 날은 한국인끼리 패싸움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살던 사람이 돈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 사정 모르는 나는 친구도 관여된 일이라 모르는 척할 수 없어 따라갔다. 그 집에 도착하자마자 당사자들끼리 약속이라도 한 듯 몸싸움이 시작됐고 나는 달려가 뜯어말렸다. 둘 다 나보다 머리 하나씩 더 컸고 운동하던 인간들이라 한 덩치 했다. 그런 덩어리들을 말리다가 몇 대 맞고 피가 나기도 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차 2대가 왔다. 한 대의 차에서만 2명의 경찰이 내려 총을 꺼내더니 뭐라 뭐라 말하며 다가왔다. 그러자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 한 명이 아시아인들은 원래 자주 싸운다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전까지는 몰랐다. 나 혼자서만 싸움을 말리고 있었는 걸. 그곳에 10명은 넘게 있었는데 다들 구경만 하고 있었다.


 가끔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행동이 옳았고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변함없이 행동하자고 다짐했다.



 분명 그렇게 다짐했건만,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나도 모르게 자버렸다. 혹시나 어제 큰 사건으로 번졌는지 불안했다. 오른쪽을 봤다. 근심 걱정 하나도 없다는 듯 옆에서 색색 숨소리를 내며 욕쟁이 아저씨는 곤히 자고 있었다. 큰 일은 없었나 보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 대지에 죄장감이 자라기 시작했다. 만약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다면 나의 뜻하지 않은 방관이 죄가 되었을 것이다. 몸의 피로가 정신을 지배할 정도로 나는 이렇게 나약해졌나. 나 피곤하다고 그냥 자 버리다니. 아줌마는 뒤에서 쌍욕 하며 따라오는 아저씨를 보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주변에 도와줄 사람은 있었을까. 아니면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있었을까. 그 주변엔 나와 외국인 2명밖에 없었는데.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보며 혹시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린 건 아닐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수를 써야 했다.


 어제 계산대에 있던 건의사항 푯말이 생각났다. 누가 쓴다고 여기에 뒀을까 등한시했는데 내가 쓰게 됐다. 몸을 일으켰다. 어제보다 호전된 통증이 왔다. 하루 만에 완치될 리가 없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발에 물집은 없었다. 1층으로 내려가 팬과 종이를 챙겼다. 입구에 캐리어 2개가 안보였다. 다시 찜질방으로 가보니 외국인들도 없었다. 앉아서 아저씨를 노려보며 일필휘지(一筆揮之)했다. 머릿속으로 忍(참을 인) 세기면서. 다 쓴 종이를 아저씨 핸드폰에 올려놓고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적었다.



 ‘자는 모습이 멋있으세요. 다음에 다시 볼 수 있길 바라요.’



 채찍보다 당근이다. 어릴 적 엄마는 내가 잘못을 할 때면 뭘 잘 못했는지 항상 내 입으로 다 말하라고 했다. 내가 내 죄를 다 고할 때까지 엄마는 나만을 바라보며 끝까지 들어줬다. 그리고 고해성사가 끝나면 짜장면을 사 주셨다.


 당근을 이용하여 내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게 만든다면 나는 이것을 복수라 말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채찍만이 복수라고 말한다.


 이 종이를 본다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그렇다면 최소한 오늘 하루 동안은 누군가에게 해코지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다시 이 찜질방에 와도 이 설렘을 느낀 장소라 어제만큼 화내는 일은 없길.



 배낭은 점점 가벼워지는데 체감은 무거워지고 있었다. 겨우 삼일밖에 안 지났는데 적응될 리가 없다. 찜질방 근처 슈퍼에서 빵과 우유, 그리고 간식거리를 샀다. 걸어가면서 아침을 해결하고 오늘은 어디로 갈지 찾아봤다. 지도를 보니 다음 도착지는 나주시가 좋아 보였다. 거리를 알아봤다.



 63.7km.



 오늘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거리다. 하지만 내일까지는 가능하다. 그래서 나주시로 가다가 잘 만한 곳에서 텐트를 치기로 했다.





 해남읍을 빠져나와 시골길을 걸었다. 구름은 한적하고 태양은 쨍쨍했다. 태양과 마주 보고 싶어 선글라스를 꼈다. 대만 친구 엔드류가  준 선글라스다.


 엔드류는 호주에서 일하다가 만난 친구다. 마지막에 멜버른에서 3일 동안 같이 여행을 했었다. 우린 서로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사진 찍기. 하지만 우린 서로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사진을 더럽게 못 찍는다고 그에게 엄청 뭐라고 했었다. 3일 동안의 사진이 483장이다. 맘에 안 들어서 지운 사진들을 빼고 말이다. 다 포함하면 1000장은 넘는다. 좀 과했다. 사실. 그래도 내가 가르친 덕분에 엔드류의 실력은 일취월장해졌다. 가끔 잘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이제 너 없이도 잘 찍지 않냐며 자랑까지 한다. 이 선글라스는 그때의 선물이다.



 어제 고속도로의 후유증으로 이번에는 틈틈이 쉬었다. 쉴 때마다 뭘 할까 생각하다가 연락이 끊겼던 사람들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어릴 때는 주변에 사람들이 참 많았었는데. 엄마 병간호를 시작한 이후로 대부분 연락이 끊겼다. 아니 내가 연락을 끊었다고 말하는 게 맞다. 만나기 힘들면 전화라도 자주 했어야 했는데 그게 잘 안됐다. 


 다행히 요즘은 SNS로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열심히 찾아서 연락을 했다. 형, 누나들에게는 욕을 한 바가지 먹었다. 친구들은 쌍욕을 했다. 동생들에게는 연락을 못했다. 아니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는 동생이 없었다. 어릴 때 항상 막내 생활을 하다가 이제 동생들이 생길 쯤에 나는 사회에서 사라졌었다. 정말 오랜만에 한 연락이다. 엄마의 투병생활이 8년이었으니.





 점심은 아침에 산 음식으로 대충 때웠다. 이번엔 누구에게 연락을 해볼까 SNS로 연락처를 찾는데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제야 하냐고 전화를 받기도 전에 내 입이 대빨 나왔다. 투덜투덜거리며 전화 버튼을 툭 치듯 눌렀다.



 “아빠, 우리 가족 맞죠?”

 “응, 그래. 몸 상태는 어떠냐.”

 “아직 초반이라서 고생 중입니다. 걱정 마세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래 고생하고 안전하게 와라.”

 “네. 아, 잠깐만요! 아빠! 그게 끝이에요?”

 “무슨 말이니?”

 “아니, 대화가 이게 끝이냐고요. 아들이 밖에서 개고생하고 있는데 무슨 전화가 이래요? 힘내라, 건강해라, 파이팅, 뭐, 이런 말 같은 것도 안 해요?”

 “그래. 파이팅!”

 “네.”



뚝.



 “여보세요? 아빠? 아빠!”



 집에 도착하면 아빠의 머리카락 하나만 뽑아보자. 아마 29년 만에 출생의 비밀을 알 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전화를 왜 급하게 끊는지 이해가 안 갔다. 다음에 전화하면 뭐 숨기는 거라도 있냐고 따져 봐야겠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제 텐트를 어디에 칠지 찾아보기로 했다.


 나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없는 밤을 보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8. 비로소 방관자가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