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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용호 Feb 04. 2019

8. 비로소 방관자가 된다.

11월 4일, 둘째 날

 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가장 먼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언제나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나도 안다. 한국사람같이 안 생겼다는 걸. 명동에서 물건을 살 때 점원이 나에게 중국말로 응대해줬었다. 심지어 내가 한국말을 했는데도 말이다. 어눌했나? 아니면 어눌하게 생겼나? 모르겠다. 이럴 때 그냥 엄마를 닮아서 그렇다고 하면 된다. 아직까지 이 말에 대답한 사람은 없다.


 해남읍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다니 뭔가 신기했다. 방금까지 아주머니는 그저 돈과 음식을 교환하는 거래자였는데 이제는 고향사람이다. 아주머니는 반가워 어쩔 줄 몰라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물 한 통을 꺼내 방금 줬던 가득 찬 물통과 바꾸며 마주편 의자에 앉았다.


 아주머니는 안양에서 태어나 20대까지 살다가 결혼 후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우리 누나와 같은 모교였다. 집도 코너 하나 돌면 있는 2분 거리였다. 기억을 찾아 내게 질문을 했다. 시장에 맛집은 아직도 있는지, 오래된 백화점은 언제 사라졌는지, 동네를 지키던 보안관 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셨는지. 우린 추억을 나눴다.


그러다 앞 테이블에서 아주머니를 불렀다. 두 손님은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한 분은 단골처럼 보였고 다른 한 분은 중국에서 온 교포였다. 그들은 아주머니에게 김치가 맛있다고 김치 좀 싸 주시면 안 되냐고 부탁했다. 해남은 아직도 이런 정이 남아 있구나 싶었다. 신기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난감해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걸 보아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아주머니는 김치가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두 손님의 대화가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식당은 조용해졌다. 나는 이 분위기를 타고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음식을 흡입했다. 빈그릇이 눈에 띄자 다시 아주머니는 나에게 오셨다.



 “혹시 아직 배 안 부르세요? 그러면 서비스로 갈비 하나 드릴까요?”



 갈비라니. 최고의 호의였다. 사실 갈비탕을 먹으면서도 메뉴판에 있는 돼지갈비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돼지갈비 정돈 먹어줘야 배가 든든할 거 같았다. 행복은 이렇게 찾아오는구나. 점점 번지는 미소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앞 테이블 두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아니면 아주머니의 마지막 대사만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저씨들의 표정이 싸늘했다. 가슴에 김치 국물 묻은 젓가락이 날아와 꽂힐 건만 같았다. 눈빛으로 ‘한 번 먹어봐, 자신 있으면.’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아주머니 복장에 눈길이 갔다. 실오라기가 풀려 너덜너덜해진 옷깃이 히터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마치 나처럼.



 “아뇨...... 아까 반찬 많이 먹어서 배불러요...... 감사합니다.....”



 침착하게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만약 내가 호의를 받아들였다면 두 손님은 노발대발 왜 자기들에게는 안 주냐며 따질 게 뻔했다. 슬프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가 행복할 선택이었다. 다 먹은 빈 그릇들을 보며 가득 채운 물 두 잔을 연속으로 벌컥벌컥 마셨다. 앞 테이블 사람들을 노려봤다. 그들은 결말에 흡족했는지 깔깔 웃으며 그들만의 대화에 빠져 있었다.


 계산을 하고 아주머니는 아침에도 영업하니까 내일 식사하고 가라고 권했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식당을 나왔다. 내일은 이 곳에 오지 않을 거다. 해줄 것도 없는데 호의만을 받고 싶지 않았다. 국토대장정이 뭐 대수라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호의를 권리처럼 사용하는 무전여행도 아닌데.


 배가 부르니 힘이 났다. 하지만 몸의 피로와 통증은 여전했다. 이제는 힘이 없어서 라는 변명이 아닌 몸이 아파서 라는 변명으로 절뚝절뚝 걸었다.



 마침내 찜질방에 도착했다. 지옥을 연상케 하는 ‘불’이 들어간 이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로 앞에 2개의 30인치 캐리어가 있었다. 카운터에는 영화 ‘노인의 위한 나라는 없다’에 안톤 시거처럼 단발머리를 한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는 삶의 지루함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계산하는 구멍으로 ‘건의사항’이라는 푯말 아래로 종이와 펜이 놓여 있었다. 이런 걸 누가 쓸까. 계산을 하고 찜질복을 받았다.



 “저, 근데 제 짐이 다 안 들어갈 거 같은데 좀 맡겨도 될까요?”

 “저기에 두세요.”



 아저씨가 캐리어 2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입구 앞에 있어서 도난의 우려가 클 거 같았다. 아저씨가 신뢰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책임감 없게 말을 해서 좀 망설여졌다.


 “아니면 들고 올라가셔서 구석에 두셔도 되고요.”


 여기보다 낫겠다 싶어 그대로 올라갔다. 남탕은 3층이었고 엘리베이터 대신 기형적으로 생긴 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이 마지막 시련이다. 마른오징어를 짜서 나온 긍정을 모아 이 악물고 올라갔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났다. 내 서랍 앞에서 가방을 버리다시피 내려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서랍 공간에 배낭까지는 넣을 수 있었다. 텐트는 어디에 둘까 주위를 탐색했다. 마침 청소도구가 구석에 있었는데 그곳에 두기로 했다.


 앉은 상태로 옷을 다 벗었다. 몸이 너무 아팠다. 통증에 일어날 용기가 없어 목욕탕까지 기어갔다. 그러다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어이쿠!”하면서 일어나 걸어갔다. 하지만 걷는 모양새가 기어가는 게 나을 듯싶었다. 목욕을 최대한 빨리 끝냈다. 



 찜질복으로 갈아입고 찜질방으로 갔다. 사람들이 TV를 보느라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반대쪽에 매트를 깔고 뻗었다.


 내 왼쪽으로는 덩치 큰 남녀 한쌍이 누워있었다. 한국 체형 치고 너무 크지 않나 싶어 얼굴을 보니 외국인들이었다. 아마 입구에 있던 캐리어 주인들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외국인들 치고는 너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평상 시면 말을 걸었을 텐데 지금은 묵언수행을 하기로 했다.


 잠이 오기 시작했다. 내일을 향해 눈을 감았다. 오른쪽에서 누군가 속닥속닥 소리를 냈다. 고개를 돌려보니 중년의 아저씨가 자꾸 혼잣말로 욕을 하고 있었다. 아마 TV 소리 때문에 불만이 극에 달해서 그런 듯했다. ‘이것은 그저 작디작은 시련이로다.’라고 생각하고 빨리 수면상태에 빠지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한 아줌마가 발 쪽으로 지나가다가 무언가를 툭 떨어뜨렸다. 확실히 작은 소리였다. 아저씨가 몸을 일으키며 혼자서 하던 욕을 아줌마에게 쏘아대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죄송하다고 말을 하고 황급히 떠났다. 여기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저씨는 끝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쌍욕을 하면서 아줌마를 따라갔다.


 세상에 별에 별 일이 다 생긴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내 앞에서 일어나야 할까? 오늘은 유난히 긴 밤이 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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