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7일, 다섯째 날
새벽의 태양이 내 몸을 태우기 전 뜨끈한 탕에 들어갔다. 나름 일찍 일어나서 여유롭게 목욕을 즐겼다. 세월의 깊이를 아는 늙은 왕처럼 피로한 몸을 풀고 있는 작은 체구의 어르신과 함께. 이제 몸의 통증은 얕은 상처처럼 의식해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처에서 나오는 피는 멈출 거 같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세상은 구름에게 지배되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비 화살을 뿌릴 것만 같았다. 찜질방과 같은 건물 대형슈퍼로 숨어 들어갔다. 먹을거리를 배낭에 가득 채울 정도로 샀다. 다시 밖으로 나오자 구름은 비 화살을 쏟아붓고 있었다. 근처 공원으로 피신했다.
공원에 있는 정자에서 빵과 우유로 아침을 해결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오늘의 종착점을 알아봤다. 어제는 내 인생의 신기록을 세웠으니 오늘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조금만 걷기로 했다. 광주까지 28.6km. 광주의 도심에 있는 찜질방이 오늘의 종착점이다. 아직도 비가 오고 있어서 모레는 어디까지 갈지 알아봤다. 30km 장성읍으로 정했다. 쉴 새 없이 오는 비는 멈추지 않았지만 안개비가 되었을 때 걷기 시작했다. 날씨를 보니 하루 종일 비가 올 예정이었다.
남고문이 보였다. 임금이 이 문을 지나가며 금성관 쪽을 돌아봤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서울에 있는 남대문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사적이다. 한참 걷다 뒤돌아 남고문을 봤는데 도로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현대문명과 아우루는 옛 멋으로 우뚝 서 있어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냈다. 나중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주를 벗어나자 장대처럼 굵은 빗줄기로 세차게 쏟아지는 작달비가 내렸다. 무슨 자기가 꼭 필요할 때에 알맞게 내리는 단비인 줄 아나 보다. 우산은 없었다. 다만 나 몰래 가족이 넣어준 우비가 있었다. 호주에서는 비가 와도 우산을 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면 오는 데로 맞으면서 걸었다. 생각해보니 우산을 산 적도 없었다.
우비는 일회용이었다. 반투명한 하얀색. 우비로서는 가장 무난한 색상이다. 파란색이나 노란색이면 거부감이 생겼을 거다. 여기서 물방울무늬가 추가된다면 잠시 입을지 말지에 대한 딜레마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배낭 때문에 우비의 단추를 다 못 채웠다. 누가 보면 뚱뚱해서 못 채운 거 같은 모양새였다.
불교에는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있다.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오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뜻이다. 지금 걷다 보니 나에게도 그 깨달음이 왔다. 하늘이 우는 날 대지를 밟아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이. 우비를 입었다지만 내부가 습해서 축축해졌고 신발은 이미 다 젖어 버렸다. 걷는 내내 신발들이 연속으로 물 방귀를 뀌었다. 찝찝해서 걷기 거북했다. 내일의 날씨를 확인해보니 내일은 굵직하고 거세게 퍼붓는 자드락비가 내릴 예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잠시 국토대장정을 멈춰야 했다.
불안했다. 연속되는 시련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주려고 하는지 몰랐다. 굳이 의미를 억지로 찾는다면 지친 나에게 잠시 쉬어 가라는 걸 수도 있다. 사실 그럴리는 없다. 애초에 이 여행은 여유 하나 없었다. 인도네시아 친구 아니가 21일 허니문을 오는데 그 안에 도착해야만 했다. 먼저 도착해서 완벽하게 준비하고 그들에게 최고의 행복을 주고 싶었다. 평생에 한 번뿐인 당신들의 추억을 내가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언제 오는지 알지만 언제까지 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어떤 계획이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아니는 나보다 5살 어린 친구다. 아담한 키에 올망 똘망한 큰 눈을 가졌다. 내가 아는 인도네시아 친구들 중 히잡이 가장 잘 어울렸다. 항상 내게 한국말로 오빠라고 불렀다. 한국 드라마에서 배웠다고 했지만 그 밖에 아는 단어는 ‘안녕하세요, 시발’ 뿐이다.
“아니, 바빠?”
“괜찮아. 무슨 일 있어?”
“궁금한 게 있어서. 혹시 한국에서 여행할 때 계획을 다 세웠니?”
“지금 세우고 있는 중이야. 혹시 내 텔레파시를 받았어? 나도 너에게 질문이 있어. 지금 서울은 춥니?”
“음…… 보통 정도? 하지만 넌 분명히 춥다고 느낄 거야.”
“맙소사!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얼마나 있을 예정이야?”
“일주일이야. 계획이 완성되면 너에게 꼭 말할 거야.”
“그래, 나 또한 너희들을 위해 완벽한 가이드를 해 줄게.”
“고마워, 오빠~”
한 동안 걸으면서 비가 오는 걸 잊었다. 추억에 잠겨 있었다. 그날도 비가 왔었다. 아니와 함께 농구를 했을 때. 비가 오든 말든 상관없었다. 공 하나로 우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