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7일, 다섯째 날
마땅히 비를 피할 곳은 없었다.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 점심을 놓치고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딱히 배고프진 않았다. 광주 끝자락에서 광고판 하나가 보였다.
가게명과 전방 2km에 있다는 중국집이었다. 전날에 자장밥을 먹어서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또 같은 가게 광고판이 나왔다. 이번에는 볶음짬뽕이 유명한지 대문작만 한 크기로 붙여 있었다.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허나 짬뽕보다 자장면을 선호하는 입장이라 내게 크게 환심을 사진 못했다. 다시 길을 걷는데 매콤한 소스에 해산물을 볶은 불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정면에 중국집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내 옆으로 세 번째 광고판이 마지막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전보다 더 큰 볶음짬뽕 사진으로. 침샘이 입안에 가득 차 꿀꺽 삼켰다. 후각과 시각으로 공격하니 진퇴양난(進退兩難)하여 백기를 들었다. 패자의 걸음으로 중국집에 들어갔다. 때마침 비는 바람비로 거세게 내렸다.
인테리어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나무판으로 칸막이를 만들고 검은색으로 깔끔하게, 그리고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줘서 식감에도 영향을 끼칠 거 같았다. 내 뒤로 빗물이 뚝뚝 흘렸다. 그래서 입구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앉았다.
식탁 위로 메뉴 판 겸 깔개인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내용을 보니 나름 유명한 체인점이었다. 일하는 사람은 스머프처럼 푸른색 복장에 흰색 마스크 낀 남자 요리사와 단발머리에 키가 작은 여자 매니저, 총 두 사람이었다. 둘 다 내 또래처럼 보였다. 이 곳에 대표 음식 볶음짬뽕을 시켰다. 메뉴에 있던 자장면이 눈에 계속 아른거렸다.
음식이 나왔다. 다른 중국집과 차이점이 있다면 밥이 나왔다. 볶음짬뽕 한입을 먹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역시 나는 자장면이구나. 맛이 없는 게 아니다. 친구들에게 이 음식점을 당당히 추천할 정도로 맛있다. 단지 내가 아무리 맛있게 먹어도 자장면의 춘장 맛이 혀 끝에 아른거릴 뿐이다.
“그…… 걸어서 하는 여행 중 이시죠?”
매니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네. 땅끝마을에서 오는 길이에요.”
이젠 자동응답기처럼 말이 나왔다.
“보통은 단체로 하던데…… 대단하시네요. 혹시 밑반찬 더 필요하세요?”
이미 그릇에 음식이 남아 있지 않았다. 깔끔한 마무리 멘트가 될 뻔했는데 아쉽게 됐다.
“아뇨, 괜찮아요. 혹시, 화장실이 어디예요?”
“저기, 뒷문으로 나가서 오른쪽에 있어요.”
배낭에서 물티슈를 꺼내 뒷문을 열었다. 드넓은 밭두렁이 시야 끝에 있는 산까지 펼쳐져 있었다. 분명 정문 앞으로 도시가 가득 차 있었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해리포터가 호그와트를 가기 위해 킹스크로스 역 9와 3/4 승강장으로 들어갈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볼 일을 마치고 다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빈 그릇들이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주에서는 홀서빙이 빈 그릇을 보면 바로 치워줬다. 그러다 보니 기다리는 모양새가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옆으로 없던 무언가가 올러져 있었다. 귤 4개였다. 요리사가 내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저희가 드릴 게 이것밖에 없네요. 하하. 죄송합니다.”
신기했다. 보통 호의를 받는 상상을 하면 항상 늙은 사람의 이미지가 그려졌는데 젊은 사람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다니. 나도 뭐라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꼬락서니부터 없어 보여서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가진 거라곤 따뜻한 마음뿐이라 아쉬웠다. 다시 한번 잘 먹겠다고 말한 후 밖으로 나왔다. 이제 실처럼 가늘게 금을 그으며 내리는 실비가 오고 있었다.
밤하늘을 보지 못한 채 목욕탕 입구에 들어섰다. 계산을 하고 한 손에 찜질복을 든 채 남탕으로 올라갔다. 내일 비가 오는 걸 알지만 둘 곳 없는 일회용 우비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다 젖은 신발을 신발장에 넣을 수가 없어서 누가 훔쳐갈 수 있지만 밖에다 두고 왔다. 만약 정말 훔친다면 슬리퍼라도 빌려서 근처에 있던 큰 매장에서 새 신발을 사기로 했다. 부디 내일 아침에 신발이 그 자리 그대로 있길. 이왕이면 다 말라 있길 바라며 작은 소망을 가졌다.
옷장으로 갔다. 옷이 다 젖어서 이 또한 안에 넣을 수가 없었다. 옷걸이에 걸어 밖에다가 널었다. 그리고 이제 씻으려고 하는데 한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오며 소리쳤다. 의아한 건 할아버지가 긴 나무젓가락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안돼요! 안돼!”
“예?”
“젊은 사람이 말이야. 이거 안 보여요?”
할아버지는 선생님처럼 나무젓가락으로 한 문구가 써져 있는 판을 가리켰다.
‘빨래하지 마시오. 옷을 말리지 마시오.’
“아, 제가 미처 못 봤네요. 바로 걷을 게요.”라고 말하며 여유롭게 웃어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만약 젖은 상태로 밀폐된 공간에 옷을 넣는다면 곰팡이가 생겨 심한 악취가 날 것이다. 그리고 그 곰팡이 옷을 입는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에게 자초지종 설명을 하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은혜받은 귤이라도 꺼내 주고 싶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잖아. 그럼 안되니까 구석에다가 널면 상관없겠지. 못 본 척해줄 테니까. 대신에! 누가 훔쳐갔다고 그러면 안돼! 내가 간간히 보긴 할 거예요.”
“예?”
“널라고!”
무슨 말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동의해 주셔서 잽싸게 옷을 널었다. 할아버지는 나무젓가락으로 등을 긁으며 떠났다. 어쩐지 나무 젓거락 끝부분이 진해 보이더라. 내일은 비도 오니 하루 쉬기로 했다. 여유롭게 목욕을 즐겼다. 이전에는 사우나를 그저 바라만 보며 상상력으로 체감을 했는데 오늘은 두 종류의 사우나를 모두 즐겼다. 마치 놀이동산에 온 아이처럼 낄낄 웃으며 번갈아 들어갔다. 곧바로 찜질방으로 입성했다.
아직 저녁시간이 안돼서 그런지 사람들이 넘쳐났다. 외국인도 있었다. 러시아 남자 5명이었다. 각자 한 손에 식혜를 들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이렇게 말이 많고 목소리가 큰 줄 처음 알았다. 그나마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자리를 잡고 근처 숙소를 알아봤다. 다행히 광주에 게스트 하우스가 있었다. 사진을 보니 한국 전통의 한옥집으로 멋이 나는 곳이었다. 가격도 싸고 근처에 있어서 더 이상 다른 곳을 찾지 않고 예약했다.
오늘은 일찍, 그리고 오랫동안 수면하기로 했다. 누워서 눈을 감았다. 많이 시끌벅적했다. 옛날 생각이 났다.
어릴 적 엄마는 미싱을 했었다. 드레스와 한복에 수를 놓는 작업이었다. 엄마는 이 일이 창피하다고 했지만 난 항상 친구들에게 엄마를 자랑했었다. 수를 놓은 꽃들이 예술적이었다.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옛날 기계를 써서 어마어마한 소음이 났었다. 텔레비전의 소리를 최대로 크게 해도 미싱 소리에 묻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가 미싱을 돌릴 때는 텔레비전의 전원은 꺼져 있었다. 할 것도 없는 나는 그 뒤에서 낮잠을 잤다. 적응해서 쉽게 잠이 들었다. 귀가 멍할 정도로 거대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꿈이라는 걸 꿨다. 그 소리가 그립다. 엄마의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