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여섯째 날
눈을 뜬 곳이 내 방이 아닌 게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찜질방에 사람들이 줄지 않았다. 시간을 봤다. 10시 3분. 얼마 자지 않아서 다시 자려고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화장실을 갔다가 정수기에서 냉수와 온수를 섞어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다시 누웠다. 자려고 시도 했다. 하지만 꿈이 없는 사람이 된 건지 몽환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심심해서 동네 친구 시호에게 카톡을 했다. 그런데 보낸 시간이 10시 14분이 표기되고 그 끝에 AM 붙어 있었다. 잠시 뇌가 일시정지했다. 숨마저 멈췄다. 날짜를 봤다. 11월 8일이었다. 그렇다. 하루가 지난 것이다.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하루 쉬기로 했었다. 게스트하우스 체크인 시간도 오후 3시여서 아직은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그래도 일어난 김에 목욕이나 즐기기로 했다.
목욕탕으로 올라가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 시간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지 의아했다. 다들 백수들인가 아니면 삶의 풍유를 즐길 줄 아는 한량들인가. 어제 널은 옷들을 확인했다. 아무도 건들지 않았지만 눅눅한 상태였다. 뒤 돌아보니 어제 그 할아버지가 나를 힐끔 보고는 씨익 웃으며 보던 신문을 이어봤다.
목욕을 마치고 눅눅한 옷을 입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지만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고 나에겐 비를 막을 도구가 없었다. 어차피 다시 한번 젖게 될 운명이다. 짐을 다 챙기고 할아버지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떠났다. 밖에다가 둔 신발도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 다행이지만 신발은 축축하다 못해 상당히 고약한 악취가 났다. 매주 냄새 같았다. 나 자신이 싫어졌다.
밖으로 나왔다. 빗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찜질방과 같은 건물에 있는 편의점에서 우산을 샀다. 남색 바탕에 토베 얀손 작가가 만든 무민이라는 캐릭터가 있는 우산이다. 다들 무민이 흰색 하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북유럽 설화에 등장하는 트롤이다. 우산을 펼쳐 비를 막으니 거대한 트롤이 그늘막을 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게스트하우스는 남쪽에 있었다. 그래서 어제 내가 걸었던 길을 다시 걷게 되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여행이 잠시 쉬게 되면서 뒤돌아 나의 소산을 볼 기회가 생겼다. 오늘은 그동안 여행을 하며 찍었던 사진을 깊게 볼 예정이다. 그리고 즉흥적였던 여행에 구체적인 계획을 넣어 보기로 했다. 이제 우리 집까지 얼마나 걸릴지 예상할 수 있는 선견력이 생겼다.
어제 받은 귤을 꺼내 먹었다. 아담한 사이즈라 나누지 않고 한입에 먹었다. 순식간에 아침이 해결됐다. 바로 이어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배낭에 아직 남아있던 간식을 꺼내자마자 입 구녕에 집어넣었다. 허겁지겁 먹어서 목이 매여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하교하는 초등학생 3명이 서로 깔깔깔 웃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진기한 광경이라도 보는지 아니면 처량하게 보는 건지 몰라도 뚫어지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민망해서 빨리 그 자리를 피했을 텐데, 오늘은 웬일인지 날 보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어 그 자리에서 점심을 계속 먹었다.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입구에서 쪼그려 앉아 먹는 모양새는 좀 구슬프게 보이긴 했을 거 같았다.
마침내 도착했다. 게스트하우스는 골목 후미진 곳에 있었다. 마치 보물찾기 같았다. 대문은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마치 조선시대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고운 기와집 사이로 청아한 돌담길이 보였다. 사뿐사뿐 빗물 사이로 올라와 있는 돌을 밟으며 들어갔다.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불러도 메아리조차 없었다. 식탁 의자에 앉아 주위를 살펴봤다. 사장님으로 보이는 아저씨와 수많은 외국인들이 찍힌 사진들이 벽에 난잡하게 붙어 있었다. 그 아래로는 흰색, 검은색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왜 여기에 고무신이 있을까 생각하던 중 사장님이 왔다. 귀를 덮는 장발에 안경을 쓰고 파란색 와이셔츠에 바지는 검은색 츄리닝을 입은 50대 중반의 아저씨였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장님이 말했다.
“어서오세요. 한국인…… 이시죠?”
장난으로 “니 하오!”라고 말하려다가 한국인이 맞다고 했다. 분명 우리 부모님은 토종 한국인의 외모인데 거울을 볼 때마다 왜 의구심이 드는지. 카운터 바로 뒤에 있는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4인실이고 아무도 없었다. 방에서 쉬기로 했다.
핸드폰으로 뉴스를 봤다. 한국에서 사건, 사고가 많아 보였다. 며칠 전 민우가 말했던 ‘살인 파티’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지방에서 인신매매당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내 일도 아닌데 마음이 불안해졌다. 밖이 어수선했다. 사장님이 누군가와 전화를 길게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컴퓨터에 문제가 있는 거 같았다. 잠시 후 내 방에 노크 소리가 났다. 사장님이었다.
“저기, 손님. 혹시 컴퓨터 좀 잘하시나요?”
“고장 났나요?”
“아니. 뭐…… 네, 그런 거 같네요. 사진들이 하얀색이 돼서요.”
하얀색 사진들이라니. 호기심에 방에서 나왔다. 카운터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봤다. 단종된 윈도우7 버전으로 상당히 오래된 컴퓨터였다. 사진들을 봤다. 정말 하얀색이었다. 컴퓨터에서 이 파일을 사진으로 인식을 못해서 그런 거다. 왜 이런 건지 알아보니 확장자명이 이상한 영어였다. 아, 말로만 듣던 랜섬웨어에 감염된 거구나. 랜섬웨어는 쉽게 말해 사장님의 소중한 추억의 사진들을 인질로 삼아 해커가 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선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돈을 지불하거나 포맷을 하던가.
“고칠 수 있겠어요?”
“아뇨, 이거 어렵겠는데요. 포맷을 해야 될 거 같아요.”
“그게 뭔데요?”
“한마디로 다 지우셔야 될 거 같아요.”
아저씨는 아쉬웠는지 흰색 도화지 같은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저 심정이 이해가 갔다. 호주에서 새 폰을 사면서 데이터를 옮기던 중 실수로 사진들과 매신저 대화 내용들의 일부가 날아간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술을 입안으로 흘리면서 내 눈물을 두 뺨에 흘러 보냈다. 사라진 추억은 이제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아니, 그냥 이메일에 야한 사진이 있길래. 호기심에 클릭 한 번 했다고 이렇게 되나? 참나.”
“포맷할까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이거(USB)에 옮기면 어떻게 안 되려나?”
“네.”
“애휴, 그렇게 해요. 그럼.”
사장님은 벽에 붙어있던 수많은 사진들을 보며 나에게 추억을 얘기했다. 중국인 교환학생의 이야기부터 스위스에서 온 가족들의 이야기까지. 얘기가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간식들과 음료수가 내 앞에 와 있었다. 사장님의 소원은 가족끼리 외국여행을 하는 거라고 말했다.
“사장님, 그럼 외국 어디 어디 가 보셨어요?”
“나는 아무 데도 안 가봤어요.”
“예? 왜요?”
“우리 딸들이랑 아내가 교회를 가야 돼서요.”
“교회야, 외국에도 다 있잖아요.”
“이 교회는 외국에 없어요.”
“어디 종파인데요?”
“XX 교에요.”
XX 교. 뉴스나 시사프로에서 자주 등장하던 문제의 종교였다. 아까 본 인신매매 기사가 생각났다. 분명 오늘 하루 쉬기로 했는데.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