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여섯째 날
당황했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떨지, 표정관리를 해야 할지 몰랐다. 허튼짓을 했다 간 무슨 일이 생길 거 같았다. 손은 떨리지 않았지만 다리가 떨려왔다. 몸을 침착하게 있었지만 눈동자는 침착하지 않았다. 사장님을 살폈다. 당연한 반응을 보는 건지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지 알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화가 끊기며 적막만이 남았다. 밖에서 바글바글한 빗소리만이 잔잔하게 들렸다. 전화가 왔다. 동네 친구 시호였다. 평생 도움 하나 된 적 없었지만 오늘은 은인이다.
“잠시만요.”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 뚜껑을 내리고 앉았다. 숨을 아래로 내려 뿜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아니, 나… 낮에 카톡 왔길래. 언제 도… 도착이야?”
“닥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잘하면 큰 일 날 거 같다. 너 XX교라고 알아?”
시호는 모태신앙이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꾸준히 교회를 다닌다. 하지만 자의로 간다고 말할 수 없다. 부모님의 눈치로 계속 다니고 있다. 강제로 주입된 지식이지만 요즘은 종교에 관심을 가지며 공부한다고 했다. 남들보다 종교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다.
“아… 아니, 처음 드… 듣는데. 그… 그게 뭐야?”
“뭐라고? 아는 게 있긴 하냐?”
“뭐… 뭐야. 무슨 이… 일인데?”
“됐다, 끊어.”
역시 여전한 내 친구다. 방금 도움이 됐다면 분명 가짜임이 틀림없다. 내 친구가 아닌 XX교에서 수신호를 해킹한 누군가가 음성변조를 해서 전화한 것일 수 있었다. 다행히 XX교는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자가 없는 듯했다. 너무 오랫동안 안 나오면 아저씨가 의심을 품어 거위의 간이라도 깨낼까 봐 허겁지겁 나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아저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시 컴퓨터 의자에 앉았다. 음료수와 간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아직 한 입도 먹지 않았다. 사장님과 대화에서 잠깐 빠져나와 한 입이라도 먹었다면 난 지금 의식을 잃고 어둠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간식들을 봤다. 한 동안 많이 먹어서 질릴 법한데 오늘따라 유난히 달콤해 보였다. 파블로프의 개 마냥 분비되는 침이 입안을 채웠다.
꼴까닥.
이렇게 시원하게 삼키고 싶었지만 깊은 산속 시냇물처럼 천천히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삼켰다. 고요 속에 삼킴은 괭음같이 들렸다. 너무 놀라 들었나 싶어 사장님을 봤다. 누군가를 속이기엔 난 너무 솔직한 인간인가 보다.
“드시면서 하세요.”
“예…… 뭐, 그럴까요? 하하하……”
여기서 무조건 하나는 먹어야 한다. 만약 먹지 않는다면 나의 의심을 눈치채고 플랜 B를 실행할지 모른다. 생각해보니 봉지를 뜯지 않은 과자들은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초코파이 봉지 하나를 뜯었다. 그리고 입에 넣으려는 순간 부정이 먼저 내 입으로 들어왔다. 주삿바늘을 이용한다면 봉지를 뜯지 않아도 무언가를 넣을 수 있다. 손은 입 바로 앞에서 멈췄다. 하지만 내 혀는 눈앞에 음식을 두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지 미친 듯이 날름날름 댔다. 그리고 자의로 입 안에 넣어버렸다. 사실 혀는 나의 의식 데로 움직였다. 난 달콤한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여리고 여린 이 마음은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면모 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알고 있지만, 맛있다. 이런 긴장감 속에 먹으니 더욱더 달달하다. 마치 이등병 시절 화장실 끝에서 몰래 먹던 그 맛이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 값싼 싸구려 속에 깊은 풍미에 빠져 음미하는 혀는 움직임이 둔해진다. 아, 이렇게 약에 취하는 건가. 초코파이 하나로 내 인생을 이렇게 바치게 되는 것인가. 안녕, 속세여.
“아직 멀었나요? 언제 끝나죠?”
“예?”
“제가 일이 있어서요. 오래 걸리면 잠시 자리를 비울까 싶네요. 어차피 오늘 손님은 손님 한 분뿐 이라서요.”
“아, 약 먹은 거 아니에요?”
“네?”
“아니에요. 그게….. 시간은 좀 걸리는데 그냥 두시면 돼요. 나중에 문구 하나 뜨면 그냥 ‘예’ 버튼만 누르시면 되고요.”
그렇게 사장님은 떠났다. 아무래도 난 꽃을 키우고 있었나 싶다. 망상의 꽃이 만개했다. 그 꽃을 꺾으려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겨 그대로 뒀다. 남은 간식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문가로 비치는 달빛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나는 바로 시계를 봤다. 오후 6시 28분. 저녁 먹을 시간이다. 밖으로 나왔다. 사장님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컴퓨터 화면을 보니 다시 사진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저녁 먹으러 가세요?”
“네, 맛집 좀 추천해주세요.”
“여기는 송정 떡갈비가 유명하긴 한데 동네 사람들은 거의 안 먹어요. 생각보다 별로 거든요. 여기 시장 쪽에 비빔밥집이 있는데 거기가 재일 맛있습니다. 거기로 가세요.”
“거기 음식점 이름이 어떻게 돼요?”
사장님이 알려주신 음식점을 검색했다. 가까웠다. 밖에는 주룩주룩 장대처럼 내리는 장대비가 오고 있었다. 아마 이번 여행의 마지막 비일 거다. 낮에 산 무민이 우산을 챙겼다. 그런데 신발이 여전히 축축해 있었다. 그래서 일단 휴지를 왕창 뜯어 신발에 넣고 나왔다. 어제 왜 있을까 생각했던 고무신들이 보였다. 사장님에게 신어도 되냐고 묻자 그러라고 했다. 검은색과 하얀색 고무신들 중 오늘의 나를 닮은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광주 골목길을 걸었다. 뭔가 우리 동네 골목길과 달랐다. 침침하다면 더 침침하지만 가로등에 빛나는 벽그림들은 오늘의 분위기를 정해주는 듯 싶었다. 사장님이 추천한 음식점에 다다르자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광경이 보였다. 저기가 오늘의 저녁 먹을 곳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송정 떡갈비집이었다. 장대비를 이겨내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게 우스워 보였다. 맛집에서 한 번 먹자고 저러고 싶을까. 나는 비웃으며 사람들의 줄 끝에서 서성이다 맨 뒤에 섰다.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난 나약한 존재라고. 분명 사장님이 맛없다고 했지만 후회해도 먹고 후회하고 싶었다. 밖에서 비를 맞으며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분위기가 좋았다. 앞에 있던 커플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좋아 보였다. 옆구리가 시렸다.
마침내 들어왔다. 떡갈비를 시켰다. 음식들이 나왔다. 떡갈비보다 더 메인 음식으로 보이는 갈비탕이 눈에 들어왔다. 맛을 보니 간이 이미 되어 더욱 맛났다. 그다음으로 떡갈비를 먹었다. 시각적으로도, 미각적으로도 갈비탕이 메인 음식이었다. 떡갈비는 그저 그랬다. 냉동식품보다 식감은 좋았지만 맛은 비슷했다. 사장님이 왜 다른 음식점을 추천했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만약 여길 안 왔다면 후회했을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험하고 후회하는 것이 더 낫다.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았다. 오늘 내 입으로 들어간 그 어떤 것보다 재일 맛있었다. 역시 식사 후 커피 한잔이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사장님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하고 다시 신발에 있던 휴지를 갈아줬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마무리하고 나 홀로 방에서 나만의 꿈을 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