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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용호 Apr 07. 2019

17. 운수 좋은 날.

11월 9일, 일곱째 날

 푹신한 느낌이다. 옆에 있는 베개를 꽈악 껴안으니 푸근하기까지 했다. 어제의 달빛이 나를 깨운 것처럼 상쾌한 햇빛이 나를 깨웠다. 오랜만에 잘 잤다. 하고 생각해보니 어제는 나 홀로 한 편의 스릴러를 찍었다는 게 생각났다. 혼자서 껄껄껄 웃었다. 조식을 먹으러 나왔다.


 아무도 없었다. 다만 식빵과 토스트기, 사과 잼, 딸기 잼 그리고 샐러드와 드레싱이 있었다. 티백도 있었다. 우유와 제주감귤 주스는 냉장고 있다는 안내문구가 있었다. 식빵을 두 조각을 굽고 샐러드를 접시에 덜었다. 좀 오래된 샐러드였다. 그래서 담았던 걸 절반을 덜었다. 식빵이 다 굽고 하나는 사과 잼, 다른 하나는 딸기 잼을 발랐다. 식탁에 앉아 가장 먼저 오래된 샐러드를 빨리 먹어버리고 딸기 잼 식빵을 먹었다.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는 흔한 맛이었다. 따뜻한 녹차 한잔을 마셨다. 이번에는 사과 잼을 바른 식빵을 먹었다. 어, 맛있다. 신선한 맛이다. 잼 사이에 사과 조각이 부담스럽지 않게 씹혔다. 잼의 특유의 달달함이 없고 딱 과일 그 자체의 사과의 단맛이었다. 완벽한 잼이다. 내 평생 이런 잼은 처음 먹어봤다. 어디서 만든 건지 확인했다. 상표 스티커에 딸기 잼이라고 써져 있었다. 때 마침 사장님이 왔다.





 “잠은 잘 주무셨어요?”

 “네, 덕분에 잘 잤습니다. 저기, 사장님. 혹시 이 사과 잼 어디서 사신 거예요?”

 “그거요? 하하하. 제 아내가 만든 겁니다. 맛있죠? 외국 손님들도 항상 물어봅니다. 그거 맛있다고요.”

 “와, 이 사과 잼은 진짜 팔아도 되겠어요. 시중에 있는 잼 보다 훨씬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더 드세요. 갈 길이 멉니다.”



 든든하게 먹으려다가 배를 빵빵하게 채웠다. 예전에 엄마가 만든 깍두기 피자 이후로 폭식한 아침이었다. 짐을 챙기고 간단히 방을 청소했다. 신발이 아주 미세하게 젖어 있어서 드라이기로 화끈하게 남은 수분을 증발시켰다. 사장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사장님이 나를 세웠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것이다. 내가 이 게스트하우스의 손님 1호가 됐다.


 밖으로 나왔다. 어제 꺽지 않았던 망상의 꽃을 이제야 꺾었다. 그리고 마당 한 구석에 심었다. 못난 기억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를. 천공에 구름이 바글바글했다. 아침에 나를 깨운 햇빛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오늘은 장성읍까지 가기로 했다. 읍이라 찜질방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딱 하나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인도네시아 친구가 오기 전까지 집에 도착할 수 있다. 날씨를 봤을 때도 더 이상 비가 올 일이 없어 자연의 이변은 변고나 변이 될 일은 없었다. 확신했다. 나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언제나 나의 확신은 빗나간다. 그래서 마음을 중립으로 옮겼다.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하자고. 광주를 벗어나자 바로 시골길이 나왔다.



 외국인들이 주로 쓰는 라인 메신저에서 연락이 왔다. 엠버라는 대만 친구였다. 호주에서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항상 우리 집에 놀러 와서 같이 놀았었다. 내가 혼자서 대만에 여행 간다고 하니까 자기 친오빠를 소개해줬었다. 덕분에 여행을 외롭지 않게 했다. 메시지를 읽어봤다. 혹시 오늘 제스퍼의 생일인 거 아냐고. 제스퍼는 엠버의 남자 친구다. 랩몬스터를 닮아서 이름 대신 항상 아이돌이라고 불렀었다. 제스퍼는 영어를 잘 몰라서 대화를 많이 하지 못 했지만 항상 핸드폰에 번역기를 켜고 내게 왔었다. 둘 다 좋은 친구들이다.


 나는 엠버에게 잠시만 기다리면 제스퍼가 곧 놀라 웃을 거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짧은 생일 축하 영상을 찍었다. 물론 보통의 영상처럼 찍지 않았다. 시골길에 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대변을 보고 있던 소의 엉덩이를 최대한 확대해서 찍었다. 그 영상에 내 축하 인사를 녹여 놨다. 반응이 기대됐다. 잠시 후, 제스퍼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맙고 엿 먹으란다. 그리고 내가 그립다고 했다. 나도 그리웠다. 떠나는 날 역까지 배웅해준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 편하라고 만든 인조 길보다 자연이 만든 흙길이 더 좋다. 걷을 때 발 끝으로 느껴지는 야생의 거친 맛도 있지만 무엇보다 배경이 아름답다. 드넓은 논밭 사이로 듬성듬성 있는 집들. 시야 끝으로 펼쳐진 풍성한 산들과 그 위에 하얀 점을 찍은 듯 한 태양. 그리고 아무도 없다.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느낌. 나만이 걷는 길 위에서 나만의 도전을 이루고 있다. 혼자만의 건곤을 이룩할 때 한 할아버지가 보였다.


 연세가 오래되어 보였다. 할아버지 손에는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긴 작대기가 있었다. 끝에는 후크선장 같은 갈고리가 있었다. 걷는 모습이 불편해 보였지만 저걸 지팡이로 쓸 거 같아 보이진 않았다. 할아버지는 옆에 있던 사다리를 올라갔다. 위를 보니 감나무가 다 키운 열매를 자랑하듯 빛깔 좋은 감을 전시해 놓았다. 과연 저 몸으로 감을 딸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늙은 몸은 그만큼 경험 많은 몸이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능숙하게 하나를 땄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할아버지가 나를 봤다.



 “할아버지, 정말 멋있으세요. 사진 하나 찍어도 될까요?”



 할아버지는 말없이 웃으셨다. 나는 사진을 찍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갈 길을 이어갔다. 그런데 뒤에서 할아버지가 부르셨다. 궁금증을 품은 채 할아버지에게 갔다. 나에게 방금 딴 감을 내밀었다. 이제 보니 물렁하게 잘 익은 홍시였다. 옆구리는 터져 보였다.



 “먹어. 새가 먹던 거라 재일 맛있는 거여.”

 “감사합니다. 근데 할아버지, 이 부분 상한 거 아니에요?”

 “이놈의 시키가! 새가 먹던 데잖여!”

 “아하하,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잘 먹을게요.”



 다시 인사를 하고 걸어가면서 홍시의 껍질을 깠다. 그리고 한입 베어 물었다. 이야, 진짜 맛있다. 슈퍼에서 파는 모양 예쁜 홍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달았다. 역시 못생긴 게 맛이 좋다고 하더니 그 말이 참말이다. 뒤돌아 할아버지를 봤다.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맛있다며 손을 흔들었다.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모르지만 할아버지는 덩달아 손을 위아래로 저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다시 사다리를 올랐다. 홍시를 조금씩 베어 물고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다 먹어 버렸다. 너무 맛있게 먹어서 남은 껍질 버리기도 아까웠다. 주변에 잘생겨 보이는 나무 아래 살포시 놓았다. 배낭에서 물티슈를 꺼내 손을 닦았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부터 운이 좋았다. 맛있는 사과 잼에 이어 홍시라니. 순간 헌진건 작가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이 생각났다. 지금까지의 행복했던 기분이 증발됐다. 차라리 소설 속 주인공 김첨지보다 또 다른 불운을 가진 피카레스크 소설 속 주인공이 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능력 없이 떠도는 삶 속에서 사회를 풍자하는 그런 인생 말이다. 불안했다. 다시 마음을 중립으로 옮겼다. 하루 동안에 마음을 두 번이나 다잡는 게 흔하지 않다. 그래서 오늘 하루가 흔하지 않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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