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일, 일곱째 날
성질 급한 밤과 함께 장성읍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좀 늦었다. 예상한 바로는 해가 떠 있을 때 도착할 줄 알았다. 하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장성읍은 활성화된 시골마을 같았다. 외각지역으로 80년대 같은 낡은 건물들이 있었고 중심지에 가까워질수록 진보해졌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건물들의 높이는 여전히 낮았다.
오늘 묵을 찜질방 건물에 도착했다. 그나마 이 건물은 주변에서 가장 높아 보였다.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으로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가 입구를 청소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보더니 내게 다가오면서 손을 휘이휘이 저었다.
“안 해요. 찜질방.”
“예? 왜요?”
“장사가 안돼서 찜질방을 헬스장으로 바꿨어요. 목욕탕은 합니다.”
“어라, 안되는데…… 그럼 주변에 다른 찜질방이 있나요?”
“없어요.”
망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20살 때 ‘노숙자가 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40분 거리에 있는 다리 밑에서 박스를 주워 다가 한동안 그곳에 살았었다. 그때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집이 없는 서러움. 밤이 되어 오갈 때 없는 그 막막함을 지금 느끼고 있다. 아저씨는 바닥에 흐를 거 같은 절망하는 내 표정을 보고 근처에 숙박업소들을 알려줬다. 하지만 안다고 한들 갈 수 없다. 텐트를 포기했던 순간 최소한의 합의를 본 게 찜질방이었다. 그 이상의 퀄리티는 내게 과분하다. 만약 이용한다면 우리 엄마 아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다.
밖으로 나와 거리를 배회했다. 다음 마을이 정읍인데 거기까지 가려면 지금부터 약 40km를 가야 했다. 한마디로 불가능했다. 불이 꺼진 가게가 보였다. 검은 유리로 비친 내 모습을 봤다.
처량한 놈.
그러게 찜질방에 전화라도 해볼 걸. 그랬다면 다른 방도를 찾았을 텐데. 하필이면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유리에 내 몸이 잘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뒤에 맨 베이지색 배낭이 돋보였다. 배낭에는 잡동사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휴대용 커피잔과 수건, 낮에 항상 쓰는 모자 그리고 침낭이 있었다.
아, 맞다. 침낭이 있다. 텐트를 보낼 때 차마 보내지 못했던 침낭이 내 배낭에 매달려 있다. 정말 만약의 상황이 생기면 쓰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그 상황이 내게 왔다. 군대 시절 수송관이 내게 한 말이 기억났다.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라.’
11월의 날씨는 아직 초겨울이라지만 만만치 않았다.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나조차 야외에서 자는 건 춥다고 느꼈다. 텐트를 치고 푹 잘 수 없었던 건 핫팩조차 이겨낼 수 없는 추위였다. 그런데 지금은 텐트로 없다. 핫팩은 하나뿐이다. 잘 곳을 잘 찾아야 했다. 일단 도시 외각 쪽으로 나갔다.
처음 장성읍으로 들어갈 때 낡은 건물들 중에 간간히 폐가가 있었다. 하지만 반대쪽은 달랐다. 공사현장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외각에서 더 걸었다. 그러다 시골길이 나와버렸다. 교회에 숙박을 부탁을 해볼까 했는데 이제 교회마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자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다 발견했다. 시골길에 항상 보이는 거대한 마시멜로 같은 볏짚을. 한쪽 구석에 모아져 있길래 저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서 잘 수 있을 거 같았다. 가까이 갔다. 하지만 생각보다 자기에는 많이 불편해 보였다. 최대한 평평한 곳에서 자야 하는데 극심할 정도로 울퉁불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닥이 진흙이라 잘못해서 아래로 떨어지면 낭패였다. 다시 다른 곳을 찾으려 마음을 정리했다.
그러다 또 발견했다. 마시멜로 옆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리던 11.5톤 트럭을. 트럭 위를 봤다. 나를 위해 청소를 해 놨는지 상당히 깨끗했다. 약간의 경사는 졌지만 이 정도는 몸의 위치만 잘 잡으면 잘 수 있었다. 정했다. 트럭 위에서 자기로 했다. 트럭 위로 오르려고 했다. 생각보다 높아 힘들었다. 배낭을 먼저 올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발판 삼아 올라갔다. 침낭을 펼쳤다. 하나 남은 핫팩을 터트려 침낭 안으로 넣었다. 신발을 벗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벗은 신발을 베개로 사용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침낭을 얼굴까지 덮었다.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었다. 밑에서 핫팩이 하루만 견디라며 따뜻한 온기를 전해줬다. 하지만 한기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잠에 들면 이 추위를 잊을 수 있겠지. 일어나면 트럭이 나를 끌고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을 거야. 그곳이 혹시 에덴의 동산이 아닐까. 그 동산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살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했다. 역시 오늘은 흔하지 않은 날이 됐다. 운수 좋은 날이다.